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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 Sep 06. 2019

마음이 마음에게

경애의 마음을 읽고

 

 나는 예전부터 소설 읽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섬세하고 연약한 인간들이 치열하고 내밀하게 헤매는 이야기를 좋아했다. 비록 그 이야기가 허구라 해도 적어도 이 세상에 나처럼 헛발질하고 헤매는 인간을 이해해줄 수 있는 단 한 명(그 소설을 쓴 소설가)은 있는 거구나 하면서 안심했기 때문이다.

 물론 때때로 나와 가까운 가족과 지인들의 방황을 보기도 하고, 나 역시 그들에게 내 것을 들킬 때도 있었다.

하지만, 얽히고설킨 이런저런 관계들과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그 방황은 엉뚱한 가면을 쓰거나, 각자의 사적인 영역으로 숨어버렸다. 또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헤매는 것의 원인, 헛발질의 결은 제각각이라 서로의 것을 완벽히 공감하기 힘들었다. ‘마음’의 방황에 대해 나 아닌 타인과 나누는 일 이토록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후부터 나는 소설 읽기에 더 빠져들었다.






 올해 봄, 나는 생애 최초 독서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올해는 내가 안 했던 행동들로 한 해를 꾸려보고자 마음먹었는데 독서 모임 참여도 그 결심의 일환이었다.

나름 소설을 많이 읽어온 사람이라고 자부했는데 주최 측이 제시한 독서 모임 중에서 내가 몰랐던 작가의 책들로만 구성된 모임이 있었다. 1초의 망설임 없이 그 모임을 신청했다.  모임 3번째에우리가 다뤘던 소설의 작가 중 한 명과 만남의 시간있었다. 독서 모임의 참여자 중의 상당수가 그 작가의 팬인 것 같았다. 그 소설 속 주인공도 그 누구보다 헤매는 사람이었지만, 나에게는 썩 와 닿지 않아 큰 감흥이 오진 않았다. 그래서 질문이 오고 가는 시간에도 딱히 궁금한 것도 없었다. 작가와의 만남의 시간이 끝나고 책에 사인을 받는 순서가 되었다. 받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래, 올해는 안 했던 행동을 하기로 한 거, 이것도 기념이다 하는 생각으로 끝에서 두 번째로 줄을 서 사인을 받았다.

그 소설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이 마지막 장이라 마지막 장에 사인을 받았는데, 작가가 써준 말이 ‘사랑하세요, 오늘도’였다.


 (아, 그놈의 사랑, 그 사랑 때문에 삼십 대 내내 미치고 팔짝 뛰어왔는데 오늘도 사랑을 하라는구나.) 

한참 동안 그 문구를 바라보았고,

마침내 독서 모임 참여자들이 가장 많이 언급하고 열광했던 (그 작가의) 소설, ‘경애의 마음’을 찾아서 읽기로 결심했다.



마음이 마음에게 쓰는 편지


 분명 내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너를 어쩌지 못한 시절이 있었다. 시작과 끝을 정확히 헤아릴 수 없었지만 너를 통 못 잡는 시간이 3년 넘게 지속되자, 생전 관심도 없었던 삼재를 들먹이며 이 모든 건 다 팔자 탓이라고 몰고 간 적도 있었다.

 정말로 ‘소멸은 정확하고 슬픈 것’이었다.


그런데 너는 정확하지 않으면서 슬프기만 했다.

눈에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은 너의 특성상 마음이 시키는 일, 즉 네가 하는 일 역시 그러했다. 그래서일까. 어쩌지 못한 나의 너를 두고서, 다른 사람들은 안 보이고 안 만져진다는 이유로 너무 쉽게 말하고 그 쉬운 말로 너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곤 했다. 그것은 말 그대로 때로는 걱정이고 때로는 위로였지만, 그 의도와 상관없이 나의 너를 다치게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오래되어 퀴퀴해진 빨래처럼) 방치된 채 흐르고 있는 경애의 시간 어떤 시간인지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런 시간을 보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의 나 (경애처럼) 힘들 때 오롯이 힘들어하고, 아플 때 완전히 아파야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특히 그것이 너와 관련된 일이면 일일수록 나에게 ‘최선’은 그저 힘들고 아파야 하는 그것 하나뿐이었다.

 이런 나에게 나처럼 마음, 너를 어쩌지 못하는 상수와 경애를 만난 것은 로 그 자체였다.  

 특히 그들이 그 와중에도 ‘산다’는 것을 이해하고, 진짜로 살려고 하는 것에  큰 감동을 받았다. 겉으로는 중량감 있는 색체에, 기포 하나 없이 단단해 보이지만 숟가락질 한 번으로 완전히 파괴되어버리는 묵 같은 인생에서도 그들은 그것을 손쓸 수가 없다고 내버려 두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언니는 죄가 없다’라는 페이스북 페이지, E에 관한 기록들을 정리해둔 블로그에 ‘파업 일기’를 쓰면서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법으로  버티고 또 버티었다.


 그렇게 둘은 살아남아, 은총으로 인해 구멍 난 마음을 서로 안아 줄  있는 ‘은총’을 받는다.

일어나서 문밖으로 나오는 일이 무동력 에베레스트 등반 못지않게 힘든 일일 수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경애와 상수, 그런 서로를 마주하게 되 그 ‘은총’ 말이다.


 나는 말이다. 너를 어쩌지 못하는 시간이 영원할 것 같을 때, 다 포기하고 도망쳐 버리거나 아예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이제와 돌이켜보니, 오락가락하고 어수선한 그 순간에도 어떻게든 견디고 버티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조금 부스러지기는 했지만, 나는 너를 끝끝내 폐기지 않기로 다. 경애와 다른 언니들처럼 어떻게 해서든 '그냥 잘 지낼 것' 나의 최종 매뉴얼 삼 한다.


나를 방기 하지 않고 가지런히 하다 보면 언젠가 나도  ‘나의 마음을 알아보는 상수’의 손을 맞잡을 수 있지 않을까.

  구원은 정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동적인 적극성을 통해 온다는 경애의 그  말에 기대를 걸고 싶다.





 
이쯤 되니 작가가 이 모든 걸 알고 그런 말을 써준 건 아닌가 하는 생각 든다.



나는 어제처럼 사랑할 거다, 오늘도.


                          

내가 할 수 있는 ''에 대한 최선은 (삶과) '사랑'에 빠지는  거였음을 인정하면서, 나에게도 은총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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