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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혜진 Dec 23. 2021

숲Ⅰ

2021-06-16,17

의자 한 개가 있다.


잠시 암전.


한 여자가 앉아 있다. 까만 눈동자 위에는 아무 표정도 떠오르지 않는다. 

“사랑할 땐 사랑을 모르고,”

건조한 음성이 공기를 타고 방을 순회한다. 

“홀로 일 땐 자신을 모르지.”

여자는 천천히 팔짱을 낀다. 조명은 꼿꼿하게 그녀만 비추고 있다. 환히 비춘 여자의 얼굴이 가늘게 떨려온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어. 똑똑히 알았지. 사랑 없이 품은 상대가 결국엔 날 찌를 거라고, 알고 있었어.”

물기 어린 눈이 깜빡, 또 한 번 깜빡인다. 

“우리는 걸었어. 오랫동안, 지치지 않고. 너무 많이 걸어서 다리에 감각이 없었지. 나는 걷는 동안 할 말을 모두 잃어버렸어.”

여자가 고개를 푹 숙인다.

“방심했지. 나처럼 그 애도 텅 비어있는 줄만 알았어. 그도 그럴게, 우린 너무 많이 걸었단 말이야. 걷는 동안 그 애 쪽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나는 앞만 봤어.”

그녀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웃는다.

“한번은 비가 왔어.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져 내렸지. 내가 물 속을 걷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어. 처음으로 그 애 손을 잡고 싶었어. 이대로 물과 함께 녹아 내릴 것만 같아서, 그래서 그랬어.”

여자의 얼굴에 웃음기가 흐려진다.

“그 때. 그 때 손을 잡지 말았어야 했나? 그 애는 놀란 것 같아 보이지 않았어. 내가 손을 잡을 걸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어.”


“손을 잡는 순간 알게 됐지. 내가 그 애를 품에 안을 거라는 걸. 우리는 그렇게 멈춰 있었어. 비가 너무 세차게 내려서 살갗이 따가웠어. 빗물이 날 도려내서 함께 흘러가고 싶어하는 것만 같았지.”

여자의 눈이 허공에 잠시 멈춘다.

“그렇게 비가 쏟아지는데도 그 애가 날 쳐다보는 건 느껴졌어. 날 아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지.그 앤 날 사랑하고 있었어. 동시에 원망하고 있었지. 난 그 앨 사랑하지 않았거든.

빗소리에 귀가 먹먹해지고 눈을 뜨고 있기가 힘들었어. 더 이상 그 애의 눈빛을 견딜 수도 없었고. 나는 그대로 그 앨 안았어. 축축해진 옷 아래로 차갑게 식은 살점이 느껴지고 귓가에는 작은 숨결이 맴돌았어. 사실 우린 너무 지쳐있었던 거야. 난 그 앨 좀 더 꽉 안았어. 이대로 녹아내려도 좋겠다고 생각했지. 그 애도 나한테 얼굴을 파묻고는 꼼짝을 않고 서있었어.”

여자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어린다.

“그렇게 한참을 가만히 있었어. 이대로 한 몸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지. 어딘지도 모를 곳에서, 우린 영영 미아가 되고 싶었어. 다시는 이런 순간이 오지 않을 걸 알았거든. 그 애를 본 것도, 그 애에게 닿은 것도, 그 애를 안은 것도 모두 처음이었어. 그 앤 마치 오랫동안 날 기다려온 것처럼 조심스럽게 날 만졌어. 누가 그 애고 누가 나인지도 모를 정도로 우린 서로에게 엉켰지. 난 그 앨 집어삼키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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