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닷새째. 끊었던 커피를 다시 마시고 있다. 팔다리는 전부 시커멓게 물들었고, 가슴에서 시작한 낙인도 점점 퍼져나가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등은 아직 그대로일지 궁금했다. 샤워를 하고 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손거울을 들고 이리저리 비추어 보았다. 허리 쪽에서부터 올라온 검은 얼룩이 날개뼈 아래에서 넘실대고 있었다. 이제 곧 척추뼈를 타고 목까지 올라오겠지. 막상 이렇게 되자 겁나고 두려운 마음보다 체념하는 마음이 먼저 생겼다. 목이 물들고 얼굴이 물들면 어떡하지. 마스크라도 쓰고 다녀야 할까.
머리를 말리고 침대에 누운 다음에도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최악의 상황들이 이미지로 펼쳐졌다. 이마 끝까지 시커멓게 변하는 몸. 경멸스러운 시선으로 쳐다보고 수군대는 사람들. 온몸을 꽁꽁 싸매고 집안에만 틀어박혀있는 나. 괴로운 나. 모든 생활이 사라져버린 나. 털실 옷으로 온몸을 여미고 번데기 속에 들어간 것처럼 움직임 없는 나의 모습을 상상하다가 눈물이 났다. 울지 말라고 하는 사람도 없는데 눈물을 참으며 조그맣게 흐느끼다가 잠들었다. 꿈에는 나비가 나왔다. 하늘을 훨훨 날던 나비는 흰 꽃잎이 여러 개 겹친 수레국화 위에 앉아 꿀을 빨았다.
종일 밀려드는 슬픔과 한탄은 나를 바짝바짝 마르게 했다. 모든 행동이 바짝 마른 통나무처럼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온 몸의 수분이 남김없이 빠진 것 같았다. 내 상태를 눈치 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팀원들은 오늘따라 모든 잡무를 나에게 미뤘다. 내 할 일로도 벅차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아직도 이 팀의 신입이었고 이방인이었다.
아래층 지원팀에서 비품을 가져가라고 전화가 왔다.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쌓인 일 때문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엘리베이터 홀까지 갔다. 하지만 지하로 내려간 엘리베이터는 올라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결국 옆에 보이는 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어두컴컴한 조명 아래로 계단이 나타났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빙글빙글 돌아가며 설치 된 계단은 보기에도 어지러웠다. 나는 이마에 나는 식은땀을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다리가 뻣뻣하게 굳은 듯 움직임이 어색했다. 이러다가 걷는 법을 잊어버리는 거 아닌가, 우스운 걱정이 들었다.
머릿속에서 사람들이 걷는 법을 잊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이 불쑥 튀어나왔다. 다들 동물처럼 네 발로 기어 다닐까? 걷는 방법을 모르는 인간들이 등장했다고 뉴스가 나오겠지? 그런데 그게 전염병처럼 온 지구에 번지게 된다면? 인간이 걷지 못하게 된다면 평범한 동물의 한 종으로 남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인간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지구의 민폐덩어리나 다름없는 인간의 자만을 떠올린다. 적어도 동물들은 지구를 파괴하면서까지 자신의 이익을 바라지는 않는다. 사자나 호랑이, 또 다른 어떤 포식자라도 그렇다. 다만 인간만이 지구를 죽여가면서, 옆에 있는 존재들을 밟아 부서뜨리면서 더 많이 가지려고 발버둥 친다. 그리고 나는 그 중에서 밟혀 부서지는 존재였다. 사바나의 새끼 가젤처럼. 세상의 모든 위협과 불합리가 내게만 쏟아지듯 닥쳐오는 것 같다. 조금만 긴장이 풀리면 바로 배고픈 사자들의 먹잇감이 되고 만다. 남의 밥이 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지 않으려면 아무리 피곤해도 긴장 속에 있어야 했다. 한시도 쉴 새 없이.
갑자기 계단을 딛는 두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오금이 저렸다. 나는 난간을 붙잡고 계단 중간에 푹 주저앉았다. 모든 것을 감당하기 힘들어서 어디론가 뿅 사라지고 싶었다. 입술이 바싹 마르고 목이 탔다. 책상위에 두고 온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