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혼자서 점심을 먹었다. 동기들끼리 점심을 하기로 했던 날이었는데 아무도 연락을 받지 않았다. 언제 한 번 점심이라도 같이 하자는 것을 미루고 미루다가 모두가 만날 수 있는 날로 약속을 정했었다. 그게 오늘이었다.
나는 오늘 아침까지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보고서 때문에 달력을 들여다보다가 겨우 깨닫고 전화했지만 어쩐 일인지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약속 시간이나 장소를 공지 받은 게 없다. 가슴 한 구석에 알싸한 냉기가 피어올랐다. 명치 근처가 동상이 걸린 것처럼 아릿하게 아프다.
혼자서 김밥으로 점심을 때우려고 밖으로 나갔다. 김밥집까지 천천히 걷다가 문득 한없이 저렴해지는 메뉴에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고의인지 실수인지 나를 빼고 자기들끼리만 맛있는 점심을 먹으러 간 동기들이 주체할 수 없이 미웠다. 마음속에서 미움이 가시덩굴처럼 뾰족하게 자라났다. 나는 원래 가려고 했던 김밥집을 지나쳐 다짜고짜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갑자기 기름진 음식이 미친듯이 먹고 싶다.
가장 구석진 자리로 안내받은 내게 웨이터는 금장식이 박힌 메뉴판을 주었다. 무의식중에 가장 저렴한 메뉴에서 시선이 맴돌았다. 스파게티 이름을 쭉 읽어내리다가 갑자기 오기가 생겼다. 이런 기분으로 돈에 대해 생각하고싶지 않았다. 나는 과감한 동작으로 메뉴판을 넘겨 스테이크 중에서 제일 비싼 것을 시켰다. 하우스와인도 한 잔 시켰다.
웨이터는 내 주문을 한 번 더 확인하고 자리를 떴다. 그가 떠났다는 것을 알자마자 맥이 탁 풀렸다. 맛있는 음식에 대한 기대가 들기도 전에 마음이 부스스 무너져내리는 것 같은 느낌과 함께 울컥 눈물이 솟구쳤다. 마음 속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귓가에 쟁쟁하다. 아까부터 아프던 가슴 중앙에 감정의 잔해라도 쌓인듯 꽉 막힌 것 같았다. 새하얀 식탁보 위에 눈물이 한방울씩 스며들었다. 멍하게 풀린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스르륵. 식탁보를 스치며 조그만 식전빵 바구니가 놓였다. 우느라 사람이 온 지도 알아채지 못했다. 나는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식탁 아래로 두 손을 감췄다. 그가 다시 어딘가로 가버렸을 때에야 겨우 손을 꺼내 눈물을 훔쳤다.
점심을 먹고 회사로 들어오다가 로비에서 동기 무리를 마주쳤다.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려고 다가갔더니 다들 당혹스러운 표정이다. 혹시나 했던 내 생각이 맞았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들은 내 전화를 못 받은 게 아니었다.
“맛있는 거 먹고 와요?”
나는 웃었다고 생각했는데 나를 본 다른 사람들의 표정이 이상했다. 어디서 한 대 맞은 것 같이 불쾌한 표정이다.
“아까 전화 못 받아서 미안해요. 진동으로 했더니 몰랐네.”
내 전화를 받지 않았던 여자 동기 한 명이 별로 미안하지 않은 표정으로 사과했다. 할 말이 없었다.
“그럼 저희 먼저 올라갈게요.”
내가 인사할 틈도 없이 그들은 게이트 센서에 사원증을 찍고 엘리베이터 홀로 우르르 들어가 버렸다.
최근 내 회사 생활은 쭉 이런 식이었다. 모두들 나를 모르는 척하고 싶은 것 같았다. 업무적인 볼일이 있어도 메신저로 짧게 메모를 남길 뿐 누구 하나 내 근황을 묻는 사람은 없었다. 같은 팀에서 늘 나를 불편하게 했던 사수와 윤대리도 요 며칠 조용했다. 조용했다고 하기보다는 나를 무시했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내게 일을 시킬 때 말고는 눈을 마주치기도 어려웠다. 나에게는 늘 부담이 되는 상사들이라 이렇게 된 것이 오히려 잘 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사람들 말고도 회사 안에 나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내게 말 걸기를 꺼려했다. 회사 전체에서 왕따 신세였다.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지 않았더니 입안이 텁텁하다. 머릿속으로 백태가 잔뜩 낀 혀를 상상하며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곧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기분 나쁜 상상 때문은 아니었다. 받은메일함에 붉은 글씨로 13이라고 쓰여 있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 메일 가장 윗부분에 부장의 이름과 ‘오늘 저녁까지’라는 제목이 올라와있었기 때문이었다. 메일을 지워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그랬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메일을 받은 적이 없다고 딱 잡아떼기에는 나 스스로도 간덩이가 작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리고 메일 제목을 클릭했다.
메일에 평소와 다른 점은 별로 없었다. 지난번 초안을 올렸던 기획서를 다시 쓰라는 것, 그리고 새로 작성해야 하는 기획서의 대략적인 내용과 지난 오 년 간의 매출 추이를 정리하라는 것이 전부였다. 메일 내용을 대충 읽자마자 머릿속에는 둥그런 시계가 둥실 떠올랐다. 시곗바늘이 미친 듯이 돌다가 밤 열두시에 가서 멈췄다. 오늘 안에 퇴근 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부장이 첨부한 파일 여러 개를 다운로드 받았다.
받은 파일을 하나하나 확인하는데 엉뚱한 파일이 하나 끼어있었다. 제목이 숫자로 된 엑셀파일이었다. 암호가 걸려있어서 회사에서 돌려쓰는 비밀번호 몇 개를 넣어봤지만 열리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부장의 컴퓨터 암호를 입력하고 확인 버튼을 눌렀다. 파일이 덜컥 열렸다. 지난번 우연히 알게 된 부장의 컴퓨터 암호를 기억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만약 기억하지 못했다면 부장은 그것도 모르고 뭐 했느냐고 나를 쥐 잡듯 잡았을 테지. 파일 안에는 사람의 이름과 숫자들이 쭉 적혀있었다. 직원들을 관리하기 위해 새로 만들었다던 코드인 것 같다. 다른 탭을 아무리 봐도 업무와 관련된 내용은 아니었다.
나는 엑셀파일을 닫고 나머지 문서를 바탕화면의 폴더로 옮겼다. 그리고 다시 오전에 쓰던 보고서 파일을 열었다. 갑자기 눈앞이 어지럽게 흩어지면서 글자와 숫자가 잘게 펼쳐졌다. 공기 중에 떠오른 글자들은 눈을 감아도 사라지지 않고 이리저리 떠돌았다. 눈이 시리듯 아프다. 커피를 마시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