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김이지 어디 있어? 야!”
출근한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어제도 야근을 해서 그런지 어깨고 목이고 심하게 결리는 것 같아 팔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과장이 사무실로 들어오며 미친 사람처럼 쩌렁쩌렁하게 소리를 질렀다. 다른 팀 직원들도 깜짝 놀라 우리 팀을 기웃거렸다. 사수는 기분 나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고 윤대리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과장의 얼굴을 살폈다. 요 며칠은 매일같이 나를 잡는 과장이지만 오늘은 그 정도가 심해서 조금 긴장됐다.
“야!”
과장은 붉어진 얼굴로 씩씩대고 있었다. 당황한 나는 엉거주춤 일어났다.
“과, 과장님.”
“뭐? 과장님? 다시 한 번 말해봐. 과장님?”
“…….”
“야, 윤대리. 지금 얘가 나한테 과장님이라고 했냐?”
과장은 광기어린 눈으로 윤대리에게 물었다. 윤대리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그런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과장이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야, 네가 날 과장으로 생각이나 해? 내가 다 들었어. 너 요즘 내 커피마다 침 뱉는다면서?”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작은 복수가 들통나자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목이 뻣뻣하게 굳어 입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할 말이 떠오르기는커녕 머릿속이 멍했다.
“아니 그, 그게…….”
“간도 크지. 로비 카페에서 침 뱉는데 그게 안 걸릴 줄 알았냐? 엉?”
어떻게 알았건 정확한 정보였다. 누군가 내가 침 뱉는 장면을 지켜본 것 같았다. 과장의 일그러진 얼굴 곳곳에서는 시뻘건 불길이 이는 것 같았다. 나는 어쩔 줄 몰라서 입만 뻐끔뻐끔 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입 밖으로는 한 마디도 나가지 않았다.
“이제 보니 이게 겉으로만 ‘네, 네.’하지 뒤에서 호박씨 까는 데는 일등이야, 일등. 내가 너 이런 년인 줄 알았으면 진작에 바꿔달라고 하는 건데……. 별 거지 같은 년 하나 때문에 내가 별 일을 다 당한다. 내가 커피 심부름 시키는 게 그렇게 아니꼬웠어? 사무실은 어떻게 같이 썼나 몰라. 너 앞으로 모든 일에서 제외시킬 거고, 다른 사람 보내달라고 할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웬만하면 네 발로 나가고. 어?”
퍼붓듯 말을 쏟아낸 과장은 들어올 때처럼 폭풍같이 사람들을 헤치고 나가버렸다. 사무실 안에는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사수가 경멸하는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윤대리도, 경수씨도 그와 비슷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가만히 나를 보던 사수가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다.
“담배나 피우러 가자.”
나는 파티션 아래로 납작 엎드렸다. 귓가에서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윙윙 울렸다. 머릿속이 텅 비었다. 오늘은 이만 집에 가고 싶었다.
“김이지. 오늘 연차로 처리할 테니까 집에 가. 그리고 내일 아침에 과장님 진정 되면 나와.”
윤대리가 사무실을 나가다 말고 내게 말했다. 사람들이 모두 나갈 때까지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구경꾼들까지 모두 없어졌을 때에야 겨우 몸을 일으켜 가방을 챙겼다. 이렇게 됐으니 더는 일하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모르게 즐겼다고 생각했던 작은 복수의 값은 생각보다 비쌌다.
회사를 나서면서 1층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샀다. 이 회사를 떠나면 다시는 마실 일 없는 커피다.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지난 1년 몇 개월의 시간을 천천히 생각했다. 고통스럽고 거북한 것이 대부분이라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과로 하던 기억, 구박받던 기억, 따돌림 당했던 기억. 좋은 기억이라고는 첫 월급을 받았을 때와 연초에 월급이 조금 올랐을 때가 전부였다. 내가 느끼는 괴로움에 비하면 돈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내게는 그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이제 더는 느낄 수 없겠지만.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플라스틱 컵에 빨대와 종이 홀더를 끼워 밖으로 나왔다. 해가 쨍쨍하다. 아직 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