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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카페인 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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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서정 Aug 28. 2024

8.11.





나는 하는 일 없이 자리만 지키고 있는 잉여인력이었다. 어제도 그제도 정각 6시가 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은 유난떤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기는 했지만 싫은 소리는 하지 않았다. 해가 지지 않은 6시 정각에 퇴근하는 게 얼마만인지 기억도 안 났다. 어쩌면 그런 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출근하는 지하철 안에서 전날의 퇴근을 회상하며 오늘도 정각 6시에 퇴근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침부터 멍하니 자리에 앉아서 파일 목록을 쭉 보고 있었다. 내 컴퓨터에 있는 자료라도 몽땅 지우고 나갈까 하는 복수심 섞인 생각 때문이었다. 내 컴퓨터의 자료를 지워도 어딘가는 남아 있겠지만, 그것을 다시 모으는 수고라도 하게 해주고 싶었다. 개중에 몇 개쯤은 아예 사라질 수도 있겠지. 여전히 사소한 복수를 위한 계획이었다. 기획서, 보고서, 판매 현황, 설문조사 결과. 파일을 하나씩 지우다가 맨 위에서 몇 번째에 있는 엑셀파일이 눈에 띄었다. 지난번 부장이 잘못 보낸 파일이다. 무슨 파일인지 다시 한 번 파일을 보려고 하는데 과장이 나를 불렀다.


“김이지. 커피 사와. 회의할 거야.”


“……네.”


“카페라떼 아이스로. 너 또 침 뱉어 봐, 어디.”


우울한 기분으로 주문을 받았다. 나에게 소리를 질렀던 그 날 이후, 과장은 계속 약점을 잡은 사람처럼 굴었다. 그는 나를 볼 때마다 내가 자신의 커피에 침을 뱉었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고 나는 수치심에 시달렸다. 할 수만 있다면 그의 입을 막아버리고 싶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멍하니 층수 알림판을 쳐다보다가 문득 엘리베이터의 매끈한 금빛 문에 비친 내 얼굴을 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씻거나 화장할 때를 빼고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알록달록한 화장을 한 겹 덧씌운 내 얼굴은 울고 싶은 사람처럼 여기저기 일그러져있었다. 그러다가 코끝이 찡하게 울렸다. 내 인생은 이제 끝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자랑일 줄만 알았던 회사에서 나는 무언가 해볼 의욕도 없이 스스로 사직서를 냈다. 조직이 내게 떠맡긴 스트레스에 괴로워한 대가는 온 몸에 걸쳐 물든 검은 얼룩이었다. 입고 있던 셔츠의 깃을 살짝 들추자 매끈한 엘리베이터 벽면에 쇄골까지 시커멓게 올라온 얼룩이 비쳤다. 얼른 다시 옷깃을 세웠다. 얼룩은 옷 안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숨죽이고 있었다.


나는 회의에 들어가지 않았다. 회의실 안까지 커피를 배달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회의실 안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커피를 받았고 내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너무 일관된 모습이라 어쩌면 자기들끼리 작당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다. 커피를 다 나눠준 내가 다시 회의실 문을 열고 나왔지만 단 한 명도 내게 남아있으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사직서까지 낸 마당이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알 수 없는 배신감을 느꼈다. 동시에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은 무력감이 밀려왔다.


침울하게 자리로 돌아와 멍하니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집에 가서 잠이나 늘어지게 잤으면 하고 바랐다. 의미 없이 켜놓았던 인터넷 창을 아래로 내리다가 열려있던 폴더 창이 맨 위로 떠올랐다. 아까 열려다 만 파일 항목에 점선으로 테두리 표시가 되어있었다. 바로 직전에 클릭했었다는 의미였다. 달깍. 커서를 대고 파일 이름을 한 번 눌렀다. 


자세히 보니 파일 이름은 ‘36410~’다. 부장이 잘못 보냈던 파일. 파일 이름을 왜 이렇게 지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제 보니 왠지 중요한 파일 같았다. 무력감과 우울감보다 호기심이 커졌을 때, 나는 파일 이름을 빠르게 두 번 클릭했다. 비밀번호 입력창이 뜨고 외워뒀던 부장의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68729598’. 번호를 누르고 엔터키를 콱 누르자 파일의 내용이 서서히 떠올랐다.


엑셀파일은 크기가 꽤 컸다. 파일 안에 4개의 탭이 있었고 각 탭마다 168개, 72개, 124개의 항목이 들어있었다. 내용은 알 수 없는 단어와 사람이름 옆으로 숫자가 여러 개씩 쓰여 있었다. 내 일이 아니라 무심하게 지나갔는데, 다시 보니 어딘가 심상치 않았다. 스크롤을 아래로 쭉 내리다가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대기업 임원의 이름이었다. 몇 달 전, 우리 회사와 체결한 계약 건 때문에 나도 얼굴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의 이름이 왜 여기에 있을까 생각하다가 이 파일에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검색해보기로 했다. 포털의 메인 페이지 검색창을 클릭하는데 괜히 손이 덜덜 떨렸다. 가나다순으로 정렬된 파일의 가장 처음에 있는 이름을 떨리는 손으로 입력했다. 보지 않아도 대충 짐작되는 결과가 겁이 나 새끼손가락에 닿아있는 엔터키 대신 마우스로 검색버튼을 눌렀다. 모니터 화면에는 대기업 이사의 정보와 말끔한 남자의 사진 하나가 인물정보로 출력되었다. 이번엔 리스트의 중간쯤에 있는 사람의 이름을 검색했다. 중견기업의 사장이 검색됐다. 나는 무작위로 몇 명을 더 검색했다. ㄱㄱ전자 사장, ㅇㅇ건설 전무, ㅁㅁ대학 교수, 정치인인 ㄹㄹ당 대표, 서울ㅇㅇ지검 부장검사 등등. 하나같이 정치, 경제, 학계를 망라한 유력자의 정보가 떴다. 그들의 이름이 우연히 한 파일에 들어있을 리가 없었다. 그들의 정확한 정체를 알고 나니 이름 옆에 적힌 30, 100, 45와 같은 숫자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등골이 서늘했다. 봐서는 안 될 것을 열어버린 기분이었다. 흰 셔츠 안 검은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나는 이 리스트가 무엇인지 회사원의 직감으로 알아버렸다. 뇌물장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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