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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카페인 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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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서정 Sep 04. 2024

8.14.




오전 일과가 끝나고 점심을 먹으러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내선전화로 통화를 하던 과장이 나를 불렀다.


“야, 이리 와 봐.”


정확히 내 이름을 부른 것은 아니지만, 이 사무실에서 과장이 ‘야’, ‘너’라고 부를만한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기운 없는 걸음으로 쭈뼛쭈뼛 다가가자 과장은 ‘네’를 연발하더니 곧 전화를 끊었다.


“너 지금 부장님한테 가 봐.”

“지금요?”

“빨리.”

“……네.”


과장은 기분이 좋아보였다. 과장에게 인사를 꾸벅 하고 사무실을 나오는데 기분이 나빴다. 과장이 이상하게 기분이 좋은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늘 나를 조롱하다시피 하는 그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하는 내가 참 딱했기 때문이었다. 멀쩡한 회사생활을 할 때도 아니고 이미 파국을 맞은 다음에도 그놈의 습관이 뭔지 나는 과장이나 부장에게 저절로 꾸벅 인사하곤 했다. 그러고 나면 가끔씩 자괴감이 몰려왔다. 너는 간이고 쓸개고 다 떼놓고 사는구나 자조하며 푸념하는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는 바지 주머니에 들어있는 USB를 만지작거리며 부장의 사무실로 갔다.


나는 부장이 보낸 파일을 혹시 몰라 USB로 옮겨 담았다. 내 컴퓨터에만 놔두다가는 언제 삭제될지 모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파일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르지만.


“안녕하세요, 부장님.”

“왔어? 우리 회사 유명인사.”


부장은 인터넷 바둑을 두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며 비아냥대는 말투로 비웃다시피 인사했다. 아마도 그는 내가 과장의 커피에 침 뱉은 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가 비꼬는 것이 기분 나빴을 뿐, 내가 과장에게 심한 잘못을 했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김이지씨는 이번 주 금요일까지만 나와.”

“네?”

“금요일까지만 출근하라고.”

“이번 달 말까지 나오라고 들었는데요.”


내가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하자 그는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랬어?”

“네.”


그는 계속 웃고 있었다. 이 대화에서 웃음이 나올만한 내용은 어디에도 없었기에 나는 조금 불안해졌다.


“그런데 지금 상황이 바뀌었잖아. 생각보다 말을 잘 못 알아듣네. 네가 사직서 냈잖아. 그걸 언제 수리하든 그건 회사마음이지. 안 그래?”

“…….”


부장이 너무 당연하게 말해서 그의 말이 맞는 것처럼 들렸다. 오랫동안 갑의 위치에서 사회생활을 해 온 사람이라서 그런지 이럴 때는 빈틈이 없다. 주눅이 들어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부장은 더 기세등등해졌다.


“대신할 계약직 이미 뽑았어. 그러니까 내일모레부터 계약직한테 인수인계 하고 금요일까지만 출근 해.”


애초에 당장 그만두고 싶어 했던 것도, 사직서를 낸 것도 나지만 이런 식으로 퇴직을 종용당하는 기분은 비참했다. 나는 쉼 없이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의 톱니바퀴 조각, 단지 그뿐이었다. 회사에 더 남아있기를 강요당하거나 예고 없이 퇴직을 통보받아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들은 내 계획이나 상황, 기분 따위는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네. 알겠습니다.”

“나가 봐.”


만족스럽다는 얼굴을 한 부장을 보면서 머릿속으로 뇌물장부를 떠올렸다. 그는 내가 그 파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겠지. 내가 이것을 폭로하게 되면 부장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어쩔 줄 모르고 내게 매달리는 부장의 모습을 상상하니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점심 메뉴는 샌드위치였다. 햄이 잔뜩 들어있는 샌드위치 하나를 시켜 자리에 앉았다. 껍질을 벗겨 빵을 한 입 베어 물며 주머니 속 USB를 떠올렸다. 우연이지만 내가 손에 넣은 이 장부를 이대로 묻어두고 싶지는 않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뇌물이었다. 내가 직접 고발하지 않더라도 언론을 통해 터뜨린다면 일어날 사회적 파장은 어마어마할 게 분명했다. 사람들의 공분을 산 뒤에는 어쩌면 기업차원의 대대적 조사가 들어갈지도 모른다. 내 생각대로만 된다면, 이 회사가 무너지는 것을 여유롭게 관망하는 것도 나름 통쾌하겠지. 회사는 그 자료가 어디에서 새나갔는지 모를 거고, 나는 안전하다. 만일 내 소행이라는 게 드러나더라도 1차적 책임은 나보다 부장에게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에 있던 불안함도 말끔히 사라졌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든 복수를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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