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끊은 지 열흘이 지났다. 검은 얼룩은 더 이상 커지지 않았다.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얼룩이 조금 빠진 것 같기도 했다.
대신 다른 증상들이 나타났다. 커피도 담배나 술처럼 금단증상이 있는 건지 시도 때도 없이 손이 바르르 떨리고 머리가 아팠다. 진단을 받은 적은 없지만 카페인 중독 때문일 거라고 단정했다. 취업을 준비하던 때부터 몇 년 동안 커피는 나의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법이었다. 하루에 서너 잔은 기본이었고, 많이 마실 때는 일곱 잔, 여덟 잔도 마셨다.
커피를 끊고 나서 가장 힘든 점은 신체적 정신적 기능이 현저히 떨어져서 먹지 않아도 되는 욕을 먹는다는 데 있었다. 일처리 속도가 느려졌고, 수면부족에 시달렸다. 멍하니 정신을 놓기도 일쑤여서 과장이 몇 번이나 내게 사나운 얼굴을 했는지 모른다. 겨우 열흘 만에 나는 똘똘한 막내에서 일 못하는 천덕꾸러기가 되어있었다. 사람들은 그 전까지 나를 똘똘하다고 평가했다는 사실을 새까맣게 잊은 것처럼 나만 보면 수군거렸다. 저 팀도 일 못하는 막내 때문에 고생이 많겠어. 윤대리가 불평이 이만저만이 아니던데.
혼자서 점심을 먹고 자리에 잠깐 앉아있는데, 부장 호출이 왔다. 자유시간을 도둑맞는 기분이었다. 부장이 있는 사무실 앞에서 몇 번 심호흡을 하고 들어갔다. 종이뭉치를 말아서 손에 든 부장은 아니꼬운 얼굴로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부르셨어요?”
불러놓고 말이 없다. 또 무슨 말을 할지 불안해졌다. 나는 시커멓게 물든 손등에 돋아난 딱딱한 물집을 만지작거렸다. 새로 생긴 습관이었다. 커피를 끊은 그 날부터 하루에 한 번 이상은 핀잔 내지 막말을 들었다. 그럴 때마다 무의식중에 손등에 다섯 개쯤 돋은 물집을 순서대로 만지작대다 보니 습관이 됐다.
“나한테 보낸 메일 이거 뭐야. 이게 최종이야?”
부장은 쥐고 있던 종이뭉치를 마구 흔들어보였다.
“……네.”
“네? 지금 네 소리가 나와? 너 뭐 잘못 먹었냐? 요즘 왜 이래 자꾸. 그, 저, 너 손이 이상해졌다더니 머리도 이상해졌냐? 정신 똑바로 차려! 내용이 엉망진창이잖아.”
부장이 버럭 소리쳤다. 그 목소리가 멀게 들리는 것 같더니 귀가 아팠다. 고막을 송곳으로 쿡쿡 찌르는 것 같은 느낌이라 눈물이 핑 돌았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조금 갈라졌다.
“죄송합니다. 다시 정리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너 이런 식으로 하면 여기서 못 살아남아. 알겠어? 정신 똑바로 차리란 말이야. 잘한다, 잘한다 했더니 이따위 문서나 결재 올리고 말이야.”
물집을 만지작대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세게 꼬집힌 물집이 조금 아팠다.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 내 책상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부장이 나를 불러 세웠다.
“너 지금 우냐? 나 원, 참. 내가 무슨 말을 못하겠네. 너 지금 여기가 네 집인 줄 알아? 일을 그따위로 하고 어디서 눈물바람이야? 뭘 잘했다고. 야, 나가. 꼴도 보기 싫어, 아주.”
부장이 손에 쥐고 있던 내 기획서 뭉치를 얼굴 앞으로 홱 던졌다. 종이뭉치에 얼굴을 정통으로 얻어맞았다. 코가 주저앉을 것처럼 얼얼했다. 부장은 의자를 뒤로 돌려 앉고 기가 찬다는 말을 중얼거렸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종이뭉치를 주섬주섬 챙겼다. 한 장도 빠짐없이 다 줍고 나서야 꾸벅 인사하고 뒤돌아 나왔다. 뒤에서 엿보던 직원들이 황급히 헛기침을 하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내 책상으로 돌아와 종이뭉치를 내려놓았다. 벌써 소문이 돌았는지 과장이 짜증스런 얼굴로 나를 보고 못마땅한 신음소리를 흘렸다. 사수와 윤대리도 그와 비슷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나는 홀린 듯 밖으로 나왔다. 다들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봤지만 말리지는 않았다.
걷는 동안 팔다리가 로봇처럼 삐걱삐걱 움직였다. 걷는 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어색하게 걸었다. 차라리 감정 없는 로봇이 되어버리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이런 상황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행동할 수 있을 텐데.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3500원입니다.”
목 위로는 전부 뜨끈뜨끈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차가운 커피를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마음 속 불안감이고 죄책감이고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커피는 금방 나왔다. 나는 낚아채듯 컵을 잡았다. 내게 커피를 전해주던 알바생은 놀란 듯 내 얼굴과 내 손을 보았다.
선 자리에서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새카만 빨대를 입에 물고 쭉 빨아들였다. 겨우 열흘 마시지 않았다고 맛이 썼다. 얼음의 온도가 식도를 타고 뇌까지 흘러들었다. 과열된 머리가 식는 것 같아 좋았다. 플라스틱 컵 속 커피가 반으로 줄 때까지 나는 쉬지 않고 커피를 빨아들였다. 그러다 문득, 가슴에서 익숙한 아픔이 느껴졌다. 차갑게 얼어붙는 것 같은 시큰한 느낌. 잊었던 불안감이 다시 몰려왔다. 먹던 커피를 던지듯 픽업대에 내려놓았다. 알바생은 황당한 표정이었다.
화장실로 뛰어가는 동안 심장이 일흔 번쯤 내려앉는 것 같았다. 설마……. 설마……. 설마……. 까만 손이 흰 블라우스 앞섶을 세게 말아쥐었다. 상상하고 싶지 않은 장면이 머릿속에 순식간에 그려졌다.
화장실에 들어가자마자 커다란 세면대 거울이 내 얼굴을 비췄다. 허옇게 질려서 어쩔 줄 모르는 히스테릭한 얼굴이 거울 위로 여유 없이 지나갔다. 얼른 칸막이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손이 떨려서 셔츠의 단추를 풀기가 힘들었다. 억지로 단추를 세 개쯤 풀었을 때 나는 어지럼증을 느끼고 변기 뚜껑 위에 풀썩 주저앉았다.
가슴 한가운데에 시커멓고 둥근 저주의 낙인이 찍혀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