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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 이인숙 Jan 11. 2022

여행은 추억을 벌어오는 것

  탁 트인 바다는 보이지 않는다. 안개 자욱한 바다는 힘센 황소가 달려오듯 허연 거품 가득한 파도를 끝없이 몰고 온다. 파도는 거침없이 달려와 바위벽을 후려치고 소금기 가득한 거품을 해안 가득 토해낸다. 차가운 바닷바람에 옷깃을 여몄지만, 가슴은 뻥 뚫리는 듯 시원하다. 새벽부터 달려온 시간이 아깝지 않다. 

  내륙에 사는 이들은 바다에 대한 향수가 특별하다. 삼면이 바다인 이 땅에서 아이러니하게도 푸른 바다를 보기 쉽지 않은 지역에 사는 터이다. 나 또한 크고 작은 산에 둘러싸인 도시에서 생활하다 바다를 마주하면, 생업에 종종대던 일상에서 해방된 느낌마저 든다. 여행할 때면 바다를 거쳐 갈 수 있도록 일정을 잡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 일정도 첫날 수덕사 템플스테이에 참가한 후, 곧바로 속초로 달려온 참이다. 바다 특유의 비릿한 내음과 거침없는 파도는 고향에서는 느낄 수 없는 풍경들이다.

  젊은 시절엔 바다에서 나는 비릿한 냄새가 싫었다. 바다를 접할 일이 없었던 산골 촌놈임을 여지없이 증명하는 것이리라. 비릿한 냄새와 거친 파도가 쉬이 익숙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이가 들며 조금씩 익숙해지는가 싶더니 이제는 바닷가 풍경이 그리워 무작정 떠나기를 반복한다. 이른 아침 수평선을 붉게 물들이며 솟아오르는 일출도 수평선 아래로 서서히 가라앉는 석양도 산 위에서 보던 그것과는 사뭇 다른 매력이 있다. 

  어느 여행 작가는 ‘여행은 돈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고 추억을 벌어오는 것이다’라고 했다. ‘여행이란 새로운 곳 낯선 곳을 찾아 그곳의 느낌을 있는 그대로 보고 향유할 수 있다. 당연히 해야만 하는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자유로움을 누려라. 그곳에서 얻은 추억의 조각들은 일상으로 돌아온 그대에게 위로가 되고 에너지가 되어줄 것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을 적어도 한 가지씩은 갖고 있으리라. 하루를 마감하고 운동을 하거나 친구들과 술 한 잔 나누며 수다로 피로를 풀어내는 이도 있다. 또한, 마음에 드는 디자인에 색까지 완벽한 옷을 발견하리라는 기대에 쇼핑센터의 문을 드나드는 이도 많다. 나 또한, 나만의 방법으로 일상에서의 탈출을 시도한다. 가벼운 주머니 사정을 종종 잊는 것이 문제이지만, 매번 준비 없이 훌쩍 여행길에 오르는 것을 즐긴다. 

  나의 외모는 누가 보아도 소주 한 병은 너끈히 먹을듯하다고 한다. 하지만 술 한 잔에도 온몸은 홍당무가 되고 두드러기가 나는 치명적 단점을 갖고 있다. 술은 피로를 풀기보단 오히려 스트레스이다. 그런 탓에 한때는 자전거 타기를 즐기기도 하고 수영이나 등산 등 운동에 열중한 적도 있다. 그러다 우연한 계기로 여행을 시작하게 되면서 나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을 터득했다. 시간이 해결해주지 못하는 일에 허둥대고 고민에 빠질 때면, 차에 연료를 가득 채운 뒤 목적지 없는 길을 떠난다. 물론 동행해주는 고마운 여행 동반자가 있기에 가능하다. 낯선 바닷가에서 이름 없는 산사에서 가끔은 한적하고 작은 어촌에서 보내는 짧은 시간은 고단함과 근심을 잊게 한다.

  몇 해 전 들렸던 거제도도 무작정 떠났던 여행지이다. 사전지식 없이 ‘소매물도에 등대 보러 가자’라며 지인을 태우고 출발했다. 등대는 당연히 바다에 있으리라 생각하고 즐겨 입던 긴치마를 치렁거리며 나선 길이다. 그런데 무슨 일인가. 등대는 바다를 건너 산을 넘고 또다시 몽돌 가득한 바닷길을 건너서야 있단다. 입고 있는 옷차림을 보니 헛웃음만 나온다. 하지만, 출발했으니 도리가 없지 않은가. 사람들의 뜨악한 시선을 뒤로한 채 치렁거리는 치마를 움켜쥐고 당당하게 걷는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다시 꼭꼭 숨겨 놓은 듯 가로막은 산을 넘으니 멀찍이 작은 바닷길 너머 등대섬이 보인다. 

  등대가 가까워질수록 바다 또한 광활한 제 모습을 조금씩 내어준다. 등대를 쉬이 보여주지 않는 연유가 충분하다. 주변의 풍경과 바다는 힘겹게 올라온 과정을 잊게 한다. 동글동글한 몽돌을 밟고 바닷길을 건너 등대에 닿자 지인은 이곳저곳을 카메라에 담느라 정신이 없다. 나 또한, 거치적거리는 치마는 잊었다. 각기 다른 두 섬이 하루에 한 번 이어지는 소매몰도와 등대섬은 그 인연만큼이나 풍경 또한 탄성이 절로 난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걸리적거리는 치마에 이번 여행은 실패라고 생각했던 스스로가 민망하기까지 하다. 소매몰도의 특별한 모습을 보고자 한다면 주저 말고 떠나라. 그대의 기대가 얼마이든 등대섬은 그대를 실망시키지 않으리라. 그날의 추억이 하얀 거품 파도와 함께 되살아나는 것만 같다.

  밤이 되어 바람이 멈추니 거칠던 바다도 조용하다. 가로등 불빛을 따라 잠시 바닷가를 걷는다. 여행은 모래알처럼 버석거리는 일상을 잊게 한다. 시끄럽던 마음이 잠잠해지니 살아있는 것을 알려주듯 허기가 찾아온다. 주변 항구를 찾아 간단히 회를 떠 숙소로 향한다. 오늘은 소주도 한잔 곁들일 참이다. 일상이 나를 지치게 한다면, 떠나보자. 그곳이 어디인들 어떠한가. 오늘을 쉬어 내일이 기운차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더불어 추억은 사은품처럼 주어질 것이리라.

  바닷가 숙소 정원에서는 꼬마들이 깔깔거리며 뛰어다니고 있다. 부모는 혹여 아이가 넘어질까 노심초사지만 얼굴엔 미소가 가득하다. 그들의 모습이 바다처럼 평온해 보이는 것은 나만의 느낌인가. 나는 오늘 이렇게 또 추억 하나를 벌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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