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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 이인숙 Jan 11. 2022

잘 늙은 절

-원주 화암사-

  주위를 둘러보아도 일주문은 보이지 않는다. 두리번거리는 나그네를 기다렸다는 듯 검둥개 한 마리가 조용히 안내한다. 녀석의 행동에서 불심이 느껴지는 건 아마도 장소 탓이리라. 아니 어쩌면 절집에 머물며 녀석도 반 부처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녀석을 따라 우화루 옆 작은 샛문을 통해 산사로 들어선다. 

  마당 가장자리 작은 고랑에 검은 자갈이 눈길을 잡는다. 흙이 처마 낙숫물에 흐름을 거스르지 못한 듯 흘러간 자리에 검은색 돌만 남아있다. 유년 시절 처마 아래 조약돌을 만지며 놀던 때를 떠오르게 하는 풍경이다. 마치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만지면 손에 사마귀 생긴다.’라고 말하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리운 마음이 일어 고랑의 돌을 주워 어머니의 손을 잡듯 살며시 움켜쥔다. 햇살 덕분인가 어머니의 마음이련가 따스한 온기가 느껴진다. 돌을 손에 쥔 채로 절집을 천천히 둘러본다. 

  화암사를 ‘잘 늙은 절’이라 부른다. 지면에 발표된 「잘 늙은 절」이란 글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사물을 남다르게 보는 작가의 혜안과 감성 넘치는 언어는 ‘어서 찾아 나서라’고 나를 부추긴다. 글과 함께 책에 실린 사진을 보니 더는 참을 수가 없다. 산사와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뛴다. 수필가와 시인은 어인 마음에 사람이 아닌 사찰을 잘 늙었다고 칭했을까. 궁금증을 안고 산사로 오르는 오솔길엔 물소리와 새 소리, 바람 소리가 조급해진 마음과 달리 발걸음을 잡는다. 절집을 찾는 이들이 정갈한 몸가짐을 하고 산사에 오르라는 뜻인가. 주변의 풍경과 벗하다 보니 어느새 산사에 닿는다. 이내 작가의 눈빛과 언어가 나를 인도한다.

  절집 오른편에 위치한 우화루 천장에선 목어가 한낮의 노곤함과 씨름 중이다. 아니 묵언 수행 중인가. 그 눈빛의 깊이를 가늠하기 어렵다. 여느 절집의 목어와는 사뭇 다르다. 울긋불긋 오색단청 입힌 툭 불거진 눈과 몸이 아니다. 목어는 단청을 입히지 않은 나무 그 자체로 천장에 매달려 졸고 있다. 눈길을 돌려 우화루 안쪽을 살펴보니 외관에서는 보이지 않던 단청 흔적이 남아있다. 사찰에선 어떤 연유에선지 재단청은 하지 않은 듯하다. 마주 보고 자리한 극락전과 적묵당 모습도 그와 같다. 세월의 흔적은 산사와 더불어 요사채 나무 마루에서도 느낄 수 있다. 보통의 사찰은 단청으로 전각도 보호하고 길손의 눈길도 사로잡게 마련인데, 어디에도 화려하게 치장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 불교와 사찰은 아픈 역사의 흔적을 담고 있다. 잦은 외적의 침략과 약탈로 사찰은 하나둘 산속 인적이 드문 곳으로 찾아든 것이다. 지금의 사찰 대부분이 산속에 있는 연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산속 깊은 곳에 존재해도 사찰은 단청하여 그 위엄을 나타낸다. 그중 금단청을 한 사찰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옛 선조들은 궁궐의 권위와 사찰의 화엄 장엄을 위해 단청을 하였단다. 물론 기후 변화로 목부재 풍해와 부식을 막기 위함과 목재의 옹이나 흠집을 감추어 외관의 미려함도 염두에 둔다. 일반적인 건물에서는 볼 수 없는 색채가 단청이다. 더구나 화암사는 독특한 건축물로 국보에 지정된 사찰이다. 글을 통해 오색단청에 그 모습이 웅장하리란 기대는 접은 후였지만, 일반적인 모습과 다른 모습이 오히려 정감이 느껴진다.

  화암사는 세상의 소음을 멀리한 채 묵언 수행 중이다. 화려하게 치장하지 않아도 그 위엄은 사라지지 않는다. 구름이 흐르듯 소리 없이 흐른 세월도 조용히 품고 있다. 아마도 깊은 산속에 자리한 절집을 수도승 외엔 찾는 이가 별로 없으리라. 세속의 발걸음이 없으니 절집은 그대로 나이가 들어갔으리라. 그렇다고 어느 한 곳 궁색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부처를 모시는 절집 본연의 모습이 나그네의 마음을 끈다. 그 모습에 수필가와 시인은 한 목소리로 ‘잘 늙은 절’이라 칭송하지 않았을까. 문득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이 떠오른다. 

  백제인들은 생활 전반에서 검소함을 강조하였던가 보다. ‘검이불누 화이불치(儉而不陋華而不侈)’,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는 말을 보면 알 수 있다. 백제 온조왕 때에 새로 지은 궁궐을 보고 김부식이 한 말이다. 화암사의 자태가 바로 그러하지 않은가. 오색단청이 없다 한들 누추하지 않으며 당대 최고의 목재를 사용했다 한들 사치스럽지 않다. 그러니 ‘잘 늙은 절’이란 표현이 참으로 적절하다. 과연 인간에게 잘 늙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자문하다 보니, 한가로운 거리에서 스친 할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할머니의 모습은 단아하다. 모시 한복 자락이 발목을 스칠 때마다 사각거린다. 주름진 소매는 무더운 여름 한 점의 바람이라도 더 담으려는 듯 방방하게 부풀었다. 백발의 머리칼을 곱게 빗어 넘긴 할머니의 모습에 자꾸 눈길이 간다. 도로가 고르지 못하여 걸음새가 조심스러워 보였으나 흐트러짐이라곤 없다. 

  현재의 모습이 곱다고 하여 지나온 삶마저 곱기만 했으랴. 흔히 칠십 년 대의 산업 일꾼을 낀 세대라 부른다. 급속히 변하는 사회와 가족을 부양코자 열정을 다해 살아온 그들이지만, 지금의 사회는 늙어 힘없어진 그들을 품지 못하니 고단하기만 하다. 지금의 할머니가 그 세대이지 싶다. 하지만, 할머니의 모습 어디에도 그런 고단함과 애처로움은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당신의 삶이 그랬으리라 조심스레 추정해볼 뿐이다. 

  누구라도 흘러간 세월의 흔적을 쉽사리 지울 순 없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찬찬히 살핀다. 얼굴의 주름을 어쩔 수 없으련만 왠지 모를 서러움이 밀려온다.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주름을 펴니 조금은 젊어 보인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웃고 만다. 주름을 걱정하다니 마음에 여유가 생긴 것이리라. 생업에 치여 시간이 어찌 흐르는지 모르고 살던 때가 불과 몇 해 전이다.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다고 했던가. 참으로 간사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나이 들어 생긴 주름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주름은 매 순간 치열히 살아온 생애 흔적이지 않은가. 이보다 당당한 훈장이 어디에 또 있으랴.

  상념에 잠겼던 마음을 깨우고 작가의 시선이 머물렀을 경내를 다시 돌아본다. 아마도 작가는 빛바랜 절집의 지붕과 벽, 목어의 눈빛에서 산사의 삶을 조심스레 가늠하지 않았을까. 할머니도 산사도 지난했던 삶을 굳이 감추려 않고 조용히 늙어가고 있는 듯하다. 굳이 단청과 화장으로 지나온 삶을 감출 감추려 애쓴 흔적이 없다. 나 또한 주름진 얼굴에 주눅들 일이 아니다. 주름 가득한 얼굴일지라도 웃는 모습이 예쁘다는 소리를 듣질 않는가. 이만하면 잘 늙어가고 있는 것이리라.

  나무 마루에 앉아 절집에 잠시 더 머무른다. 어찌 겉모습만 보고 ‘늙었다, 젊었다’ 말할 수 있으랴. 육신이 늙는다는 것보다 무서운 것은 마음이 늙는 것이다. 스스로 최선을 다해 사는 삶이 잘 늙어가는 생이지 않을까. 사찰의 문을 나서려니 검둥개가 대문 밖까지 나와 나그네를 마중한다. 햇살이 검둥개 뒤로 긴 그림자를 만든다. 잘 늙은 절집과 한 몸처럼 느껴지는 검둥개에게 미소를 보내며 발걸음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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