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여기 살아요
10월 하고 6일이나 지났건만 리스본은 여전히 낮기온이 30도를 넘어서고 있다.
오늘도 32도까지 오르고 다음 주에도 28,29도 언저리에 머물 것으로 예상된다.
아침에는 이제 확실히 선선한 바람이 불지만 낮엔 여름처럼 덥다. 여기 사람들은 그저 해가 쨍하고 나면 "beautiful weather"라며 좋아하지만 가을인 것 같은데도 여름처럼 삐질삐질 땀을 흘려야 하는
갱년기 한국아줌마는 이런 날씨가 좀 힘겹고 지겹게 느껴진다. 이젠 긴팔옷을 입고 싶다고.
하지만 날씨와는 상관없이, 청명한 가을날을 상상하며 리스본을 찾는 관광객은 더 많아진 느낌이다.
땡볕에 노란색 관광버스 이층에서 리스본 거리를 구경하는 관광객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좀 측은한 생각도 든다. '이렇게 더울 줄은 생각도 못하셨죠?'라며. 아침에는 경량패딩을 입은 관광객도 꽤 볼 수 있는 걸 보면 지금의 이 늦더위가 일반적인 것은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관광객들을 보고 있으면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나도 예전에는 저런 관광객의 입장에서 유럽의 시내를 돌아다니곤 했는데. 그때는 일분, 일초가 다 소중하고 행복했는데. 지금의 나는 여기에 살다 보니 관광객이 갖는 그런 내밀한 행복감이나 많은 것을 보고 가야 한다는 강박, 며칠 뒤면 돌아간다는 아쉬움 등은 느낄 수가 없다. 돌아갈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거주자가 느낄 수 있는 상대적 행복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관광객이었던 예전의 내가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을 한없는 부러움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듯이, 지금의 저들도 나를 그렇게 바라보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 상대적 행복감은 더욱 커진다.
사실, 나는 여기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아직 포르투갈의 대표적 관광명소를 둘러보지 않은 곳이 많이 있다. 제로니무스수도원이며, 렐루서점이며, 파스테이스 드 벨렝 같은 곳들 말이다. 포르투갈을 다녀왔다고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가봤을 그런 곳들을 나는 아직 아껴두고 있다. 나는 언제든 시간 날 때 갈 수 있으니까 관광객들 속에 끼어서 북적거릴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이런 것들이 아마도 관광객이 아니라 거주자가 느끼는 여유로움일 것이다.
리턴티켓 없이 외국을 나온 것은 이번이 두 번째이다.
이십여 년 전 어학연수를 떠났을 때도 그랬지만 리턴티켓이 없다는 것은 묘한 짜릿함을 준다.
시간에 쫓길 필요가 없으니 마음은 한없이 여유롭다. 하지만 단점도 있다.
리턴티켓이 없는 외국인은 입국심사가 좀 까다로울 수 있다. 리턴티켓이 있으면야 "travel"이라고 간단히 대답하면 그만이지만 그 티켓이 없으면 나의 입국목적에 대해서 자세히 밝혀야 할 위험이 따르는 것이다. 물론, 나는 입국에 대한 이민국 서류가 있어서 경유지에서나 포르투갈 입국 시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운이 없으면 이런저런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리턴티켓은 어찌 보면 외국에서 나의 안전을 보장해 주는 티켓이기도 한 셈이다. 그런 리턴티켓이 없다는 것은 이제 나에게는 이곳에서의 생활이 무한히 펼쳐진다는 의미이다. 한없이 자유롭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또한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탐험해야 한다는 중압감도 함께 밀려온다.
이렇게 나는 유럽의 한쪽 포르투갈에서 리턴티켓 없이 사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바랐던 유럽식 아파트에 살며 유럽거리를 매일같이 걷는 사람,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포르투갈말에 둘러싸여 영어로 소통해야 하는 사람, 자주 중국인으로 오해받는 흔치 않은 한국인으로 말이다. 이곳에서의 삶이 기대가 된다. 어쨌거나 나는 이곳에서 적응을 해서 살아가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