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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중얼 May 24. 2016

<미 비포 유>

삶을 선택할 권리에 대하여

(스포일러 있음)


우선 남자 주인공이 개 잘생겼다.

샘 클라플린

멋지지만, 미친놈들이 가득했던 <라이엇 클럽>에도 나왔다고 한다.

왠지 익숙하다 했어.

꿈에 나왔었나 했네.


잘난 외모로 잘난 인생을 살아왔기에 사고 이후의 삶에 더욱더 적응하기 어려운 윌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자리를 찾다 간병인이 된 사랑스러운 수다쟁이 루이자가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여자 주인공은 너무나 사랑스럽다.

에밀리아 클라크

어쩜 저렇게까지 사랑스러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사랑스럽다.

이 영화 말고 다른 인물을 연기할 땐 또 어떨지 평상시엔 또 어떨지 궁금할 정도다.

여자인 내가 봐도 반하겠는데 남자분들은 어떨지.

스틸샷을 첨부하려고 했지만, 루이자의 사랑스러움과 윌의 잘생김이 잘 보이지 않아서 영화로 확인하길 바라는 마음에 첨부하지 않겠다.


일단 이 둘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볼만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좀 더 큰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영화가 좋은 점은 여기에 있다.

나쁘지 않고 착한 이야기지만, 그러면서도 우리가 살아가면서 생각해볼 문제를 던져줬다.

심지어 모든 인물의 마음이 공감되면서 더 흥미롭게 볼 수 있는 영화였다.


윌은 불의의 사고로 목 이하의 신체가 마비된다.

모든 것을 가진 삶을 살았던 그는 그 사고로 모든 것을 잃는다.

그저 잃기보다 자신도 모든 것을 잃게 되기를 원한다.

사고 후에 그의 여자친구도 옆에서 그를 돕길 원했지만, 그는 그조차 거부한다.

상대가 도움받고 싶어야 도울 수 있지.

그녀는 노력했지만 거부당하고 윌의 곁을 떠난다.

그리고 옆에서 위로해주던 윌의 가장 친한 친구와 결혼한다.

윌은 여자친구와 친구를 잃는 것에서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을 그만두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이미 사고가 났을 때부터 그는 모든 것을 잃었고 그때 죽지 않을 것을 후회하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삶도 잃어버리길 원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걸 받아들일 수 없었고, 6개월의 유예 기간을 갖기로 한다.

일자리를 구하던 루이자는 윌의 간병인으로 오게 된다.

간병인 일을 처음 해봤지만, 루이자는 가족을 위해 일해야 했기 때문에 자신을 밀어내는 윌에게 지지 않고 버텨낸다.

자신을 동정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루이자 본인과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에 마음이 움직인 윌은 루이자에게 점점 마음을 연다.

그러다 루이자는 윌이 6개월 후에 안락사하기로 되어있는 것을 알게 되고 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노력한다.

둘은 서로 깊게 교감하지만 윌의 결심은 변하지 않는다.


선천적인 장애도 물론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삶에 적응해 나가는 것에 있어서는 후천적으로, 사고로 인한 장애가 역시 더 어렵지 않나 싶다.

이미 경험하고 느꼈던 감각들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린다는 것은 나에겐 상상조차 어려운 일이다.

윌은 누구나 부러워하던 삶을 살았고 또 본인도 그 삶에 아주 만족하며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들이 사라진 것이 더 큰 좌절일 것이다.

나도 윌처럼 누구나 부러워하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니지만, 사고로 장애가 생겼을 때 '내가 살아갈 수 있을까? 견딜 수 있을까? 나는 살고 싶지 않을 것 같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기 때문에 윌의 마음에 공감이 많이 되었다.

<크로닉>을 보면서도 많이 느꼈던 감정이다.

윌은 부유한 가정이라 정말 좋은 환경에 지내고 있다.

불편해진 윌을 위해 마구간을 개조해서 윌을 위한 공간을 따로 만들고, (욕실까지도) 휠체어로 이동 가능한 차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윌 같은 장애를 가진 분들은 사실 이동도 자유롭지 못하다.

<미 비포 유>의 배경인 영국도 윌의 집안이 특별히 좋아서 가능한 일 일지도 모르나 우리나라는 특히 어려운 것도 틀린 얘긴 아닌 것 같다.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그는 진짜 좋은 환경에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너무 힘들고 고통스럽다.



아니, 당신은 가지 말아요. 윌을 성인 남자로 대해줘요.


루이자와 첫 외출을 하던 날.

윌의 아버지가 윌의 어머니에게 한 이야기이다.

이 얘기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우리는 간혹 우리보다 불편해 보인다는 이유로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과도한 친절을 보인다.

그런 이유에는 진짜 그 사람의 성품이 그렇게 착한 것일 수도 있겠고, 아니면 누군가를 돕는 행위를 통해 내가 더 나은 사람이라고 느끼고 싶은 마음이 있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의 눈에 좋은 사람으로 비치고 싶은 것일 수도 있고, 그 사람과 닮은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떠올라 그렇게 행동하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선의에 그렇게 행동하는 분들이 더 많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 배려했는지 더 큰 상처를 줬을지는 한 번 더 생각해봐야 한다.

장애를 가진 분들도 할 수 있는 많은 것이 있다.

장애를 가진 몸으로 살아오며 그에 맞는 것들에 익숙해지도록 많은 시간을 보내왔다.

그들은 어쩌면 제대로 구실 하지 못하는 자신들에게 이미 화가 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사실에 벌써 힘이 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들을 이겨내고 해낼 수 있게 되었는데 모든 것을 못한다는 듯이 취급하면 안 된다.

그들이 불편한 것은 신체의 일부 또는 전부이지 그들의 정신까지도 불편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간혹 정신이 불편한 분들도 있지만)

그러므로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애 취급을 받거나 과도의 친절로 인한 불편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

다른 것들로도 이미 어려움을 겪고 있다.

불편을 더해주지 말고, 필요한 것을 도와주자.

요구한 것을 도와주자.

그리고 도울 때 절대 내가 더 낫거나 우월하기 때문이라 생각하지 말고, 그냥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자.

우린 동등한 인간이다.


다시 영화 얘기로 돌아와서

윌의 엄마도 아들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함께 하려고 했던 것이지만, 온전한 성인 남자로 대해주지는 못했다.

역시 남자의 마음은 남자가 더 잘 아나 보다.

저 대사가 가장 와 닿았고, 결국엔 윌이 생을 마감하고 싶던 이유가 아닐까 싶다.

윌 자신도 자신을 그냥 성인 남자로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에(대사로도 여러 번 언급된다.)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던 것은 아닐까.


윌은 결국 사랑하는 사람들과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그들의 곁에서 떠나간다.

윌은 지독히 이기적이고 냉정해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찌 보면 또 그만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앞으로 계속 살아가야 할 루이자의 입장에서는 저런 기억의 사람이 있다는 건 축복일까 아니면 너무도 가슴 아픈 일일까.


남은 평생을 살아도 이렇게 깊게 교감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지 못 할 수도 있는데 떠나보내 준 루이자와 사랑하는 아들을 떠나보낸 윌의 부모님도 참 대단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깊게 원한 일이라도 들어주기 어려운 일이었을 텐데.


가볍고 따뜻하게 사랑하는 누구와도 볼 수 있는 영화지만, 마냥 가볍지만은 않고 삶이라는 것에 대해 또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내 사람들에 대해 나에 대해 더 생각해보게 해주는 좋은 영화였다.

OST도 영화와 아주 적절하게 잘 어우러졌고, 영상도 자극적이지 않고 아름답고 상징적으로 표현되었다.

특히 윌의 죽음을 표현한 장면이 참 예뻤다.


소설이 원작이라고 한다.

아직 읽어보진 않았지만, 이 작품은 다른 소설 원작 영화들과 다르게 영화가 더 아름다울 것만 같다.

기회가 되면 원작 소설도 읽어봐야지.

영화의 감동이 잊힐 때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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