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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siantak Feb 16. 2021

화장실에서 길을 물었다.

가지 않은 길

“단풍 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몸이 하나니 두 길을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한참을 서서 낮은 수풀로 꺾여 내려가는 한쪽 길을 멀리 끝까지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 중에서   

 

내 마음의 불시착

우리의 삶은 언제나 선택의 연속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고 나면 선택의 경우의 수는 더 복잡해진다. 결혼 전에는 나 자신과 부모님, 결혼 후에는 가족들이 포함되었다. 직장과 가정이라는 두 공간을 잘 유지하며 살아야 하는 젊은 날의 때가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한 분야의 실무자로서 회의 자료를 주말을 반납해 가며 작성했다. 보고일자가 되어 작성한 보고서를 들고 상급자 사무실을 노크하고 들어갔다. 보고서를 검토하는 동안 나는 책상 옆에 서서 쳐다보았다. 몇 장을 검토했을까?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오직 기억에 생생하게 저장되어 있는 장면은 단 하나였다. 수십 장의 보고서가 공중을 날고 한 장 한 장의 종이가 사무실 바닥에 불시착이라도 하듯 떨어지는 모습. 그 종이와 함께 나의 마음도 어딘가에 불시착하고 말았다. 슬픔, 억울, 당황, 불안, 부끄러움 등 감정의 소용돌이가 강하게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앞이 캄캄했지만 아무 말없이 내 몸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의 시간과 노력이 담긴 보고서 한 장 한 장을 줍기 시작한 것이었다. 상급자가 보기에 너무나 부족한 보고서라고 판단하고 쓰레기 취급한 그 보고서를 모두 주어서 조용히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어디로 갈까? 이 상태로 동료들이 있는 사무실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 가는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화장실로!’     


화장실을 전세내다

누구의 방해도 받고 싶지 않았다. 위로도 필요 없었다. 오직 혼자 있고 싶었다. 내 주변의 그 누구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때만큼은 나 자신만이 중요했다.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화장실 한 칸을 전세라도 낸 듯이 나만의 공간으로 삼았다. 보고서를 끌어안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런 수모를 당하다니. 아무리 보고서가 마음에 안 들어도 이럴 수가 있을까?’

밤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별들처럼 셀 수 없는 생각들이 찾아들었다. 이 작은 뇌에 무슨 생각이 이리도 많이 떠오르는지 머리가 아프고 속이 쓰릴 정도였다.

‘이 일을 때려치워 버릴까? 이런 수모를 겪으면서 참고 가야 되는가? 이런 대접을 받으려고 지금까지 왔는가?’

온전히 나만을 생각한 이기적인 생각들이 먼저 나를 세차게 두들겼다.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 생각에 공감하고 동의하고 싶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감정에 순응하고 싶었다. 현실을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런데 문득 떠오른 사람들이 있었다. 부모님과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아이들이다. 지금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에 언제나 응원하고 계신 부모님을 실망시켜 드릴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만큼 겁쟁이였는지도 모른다. 실망을 품은 부모님의 모습을 볼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나를 믿고 기다리는 가족들이 더욱 아른거렸다.

‘이 길을 벗어나 새 길을 가족들과 함께 갈 수 있을까?’ 가장이라는 무게감, 이 고민이 더욱 나를 짓눌렀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지 않은 길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지으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고, 나는-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택했다고 그리고 그것이 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고’

나는 후회하지 않을 길을 택했다. 아니 어쩌면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택할 자신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솔직할 것 같다. 그렇게 나는 눈물을 흘리며 한참을 화장실에 앉아 있었다. 이곳을 떠나느냐 마느냐 이것이 문제였다. 고민, 고민, 고민을 했다. 그리고 선택했다.

‘이 상황을 회피하면, 이런 것도 이겨내지 못한다면 그 어디서도 이겨낼 수 없다. 나 혼자 보다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자.’

나를 포기하고, 아니 나 너머의 가족을 먼저 생각했다. 이 생각이 나를 이끌고 있었다. 무거운 나의 마음을 이끌고 가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후회하지 않을 지금 걷는 길을 계속 걷겠다는 선택을 했다. 눈물을 닦고 전세를 냈던 화장실을 나와서 사무실로 들어갔다. 웃으면서. 사무실 사람들이 나를 찾아 한참을 찾아 돌아다니고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미안함을 전하고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퇴근했다. 여느 때처럼 웃으면서 가족들 품에 안겼다. 이렇게 화장실에서 보낸 긴 하루가 끝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보고서의 악몽은 나의 가는 길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두 길 앞에서  내가 갈 길은?’    


“화장실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몸이 하나니 두 길을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한참을 앉아서 괴로운 상황을 벗어날 한쪽 길을 멀리 끝까지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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