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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siantak Nov 15. 2021

아버지의 시선

이제 편하게 살아라

어쩌다 부모님 집에 내려가면 아버지는 침대에 누워서 벽에 걸려있는 사진을 쳐다보고 계셨다. 그 액자 속의 사진은 바로 ‘나’였다. 다섯 손가락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 손가락은 없다지만 5남매 중 유독 벽에 걸려있는 내 사진을 바라보고 계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버지는 지체 마비 증상이 있어서 걷는 것도, 말하는 것도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무슨 말씀을 해도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에 사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아보지 못했다. 아니 여쭤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나에 대한 응원이자 미안함에 말없이 사진을 바라보고 계심을.


언젠가 진급 심사에서 떨어졌을 때였다. 마음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는데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주저앉고 싶기도 했고, 모든 것을 그만두고 싶기도 했다. 무엇보다 나에 대한 가족들의 기대감이 나를 더욱 짓누르고 있었다. 부모님을 찾아뵈던 어느 날, 아버지 모르게 내 마음을 털어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미리 준비해 간 계급장 달린 전투복을 몸이 불편한 아버지께 입혀 드렸다. “아버지, 아들 옷 입어 보실래요?” 아버지는 항상 그렇듯이 웃음으로 긍정의 답을 표현해 주셨다. 이때 내 진짜 마음은 이랬다. ‘아버지! 저는 더 이상 진급은 안 되겠어요. 여기까지 인 가 봐요. 더 기대는 하지 마세요.’ 어쩌면 아버지도 내 마음을 알아채셨을 것이다. 아버지니까. 표현은 잘 못하시는 성격이셨지만 속은 깊으셨다. 아들의 계급장 달린 군복을 입으신 아버지는 무슨 마음이신지 웃음을 보이셨다. 이 모습을 놓칠세라 바로 사진 한 장을 기록에 남겼다. 지금 생각해도 사진 촬영을 한 것은 잘했다.


아버지의 말씀으로 시작해서 내 꿈과 목표가 생겼고 오직 그 길을 걸어온 20여 년. 내 인생은 아버지의 인생이나 다름없었다. 아버지는 나의 길을 응원했고, 나는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한 길을 우직하게 걸었다. 그 길은 때론 외로웠고, 때론 힘에 겨웠다. 물론 보람도 있었고, 행복했으며, 많은 것을 얻으며 살았다. 마치 외나무다리를 걷는데 강풍이 불어 떨어지지 않기 위해 양팔을 벌려 균형 잡기에 바쁜 모습처럼 살아왔다. 이런 무거운 마음을 덜어내려고 아버지께 입혀 드렸던 군복. 이런 나의 마음을 어떻게 알아보셨을까? 언젠가 다시 찾아뵈었을 때, 아버지는 들릴까 말까 한 소리로 말씀하셨다. “이제 편하게 살아라. 그 정도면 됐다.” 소리는 작았지만 내 귓가에는 또렷이 들렸다. 그리고 그 소리는 내 마음속 깊이 파고들었다. 꽁꽁 얼어붙은 동토에 따뜻한 태양이 비추는 것처럼, 내 마음은 녹아내리고 있었다. 지난번에 군복을 입혀 드렸을 때 이미 내 마음을 읽고 계셨던 것이 확실했다. 자식 마음의 무게를 이제는 덜어줄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가지신 모양이었다. 어쩌면 서서히 내 곁을 떠나실 준비를 하고 계셨던지도 모른다. 나를 통해 이루시고자 했던 아버지의 꿈을 이제는 내려놓겠다는 말씀이었다. 아니, 그 정도면 아버지의 꿈을 이루어 주었다는 뜻이었는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는 말을 애써 돌려서 하셨는지 모른다. “이제 편하게 살아라.” 이 소리는 아직도 내 귓가를 떠나지 않고 있다. 아버지의 이 한 마디는 ‘아버지의 기대’라는 틀 안에 갇혀 있던 나에게 자유함을 주었다. 그동안 아버지의 기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적성에 맞지 않은 것도 인내하고 반복하여 적성에 맞는 것처럼 나를 포장하며 살아가려고 노력했다. ‘반복과 인내’는 나에게 타이탄의 도구와 같았다. 이제는 이 도구를 가지고 아버지께서 선물해 주신 또 다른 삶을 살아가 보련다. 이후로 나는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생활하게 되었고, 그 결과인지 포기했던 진급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에게 자유함을 주었던 아버지의 마음이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한 번도 속마음을 터놓지 못했는데 이렇게 뒤늦게 글로써 표현하게 되었다. 이 글은 내가 갈 수 없는 시공간을 초월해서 저 하늘 어딘가에 계실 아버지께 잘 전달되리라 확신하며. 이 글을 마치려 하니, 내 영혼의 온기가 전해져 온다. 따뜻하다. 아버지의 품에 안긴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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