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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siantak Sep 01. 2020

리더의 숲에서 깨달은 지혜

1. 창세기의 사과(유혹)를 주의하라 2

리파남은 또 다른 사과를 쳐다보았다. 다른 시과에 비해 높은 곳에 있었다. 리더에게 명예는 바늘과 실 같은 관계라고나 할까? 리더의 위치가 올라가는 만큼 명예도 따라 올라간다.

"청년!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사과 보여요?"

"네, 보여요. 명예라는 글자가 쓰인 사과"

리파남은 리더와 명예욕에 대해 얘기해 주기 시작했다.


“한산의 패배에 대하여 원균은 책형(磔刑)을 받아야 하고 다른 장졸(將卒)들은 모두 죄가 없다. 왜냐하면 원균이라는 사람은 원래 거칠고 사나운 하나의 무지한 위인으로서 당초 이순신(李舜臣)과 공로 다툼을 하면서 백방으로 상대를 모함하여 결국 이순신을 몰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일격에 적을 섬멸할 듯 큰소리를 쳤으나 지혜가 고갈되어 군사가 패하자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와 사졸들이 모두 어육(魚肉)이 되게 만들었으니 그때 그 죄를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한산에서 한 번 패하자 뒤이어 호남(湖南)이 함몰되었고 호남이 함몰되고서는 나랏일이 다시 어찌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사를 목도하건대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으려 한다.”
-선조실록 선조 31년(1598) 4월 2일 기사 중 사관의 논평-


 “리더로서 조심해야 될 것 가운데 하나가 명예욕이라네. 명예욕에 사로잡히면 리더의 본질을 잊어버리고 허상을 좇아갈 가능성이 높아지지. 이순신 장군과 원균 장군의 이야기예요.”

칠천량 전투 때 전소된 운주당이 1738년 중건 후 제승당으로 이름 지어졌다. (사진 출처: 연합뉴스)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에 주둔했을 때 좋은 계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는 누구든지 의견을 논했던 ‘운주당’이라는 장소가 있었다. 그러나, 원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후에는 운주당이 애첩과 밀회를 나누는 장소로 변해버렸다. 작전을 위한 모두의 소통 장소에서 개인적인 장소가 되었고, 결국 회의나 작전을 위한 소통은 사라졌다. 현재의 제승당은 칠천량 전투 때 불에 전소된 것을 150년이 흘러 영조 15년에 통제사 조경이 운주당을 중건하고 이름을 다시 지은 것이다.


서애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원균의 한산도 생활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처음 원균이 한산도에 부임하고 나서 이순신이 시행하던 규정을 모두 변경하고, 부하 장수들과 사졸 가운데 이순신에게 신임을 받던 사람들을 모두 쫓아버렸다. 특히 이영남은 자신이 패전한 상황을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이므로 더욱 미워했다. 군사들은 마음속으로 원균의 이러한 처사를 원망하고 분개했다.
이순신은 한산도에 있을 때 운주당이라는 집을 짓고 밤낮으로 그 안에 거쳐하면서 여러 장수와 전쟁에 관한 일을 함께 의논했는데, 비록 지위가 낮은 군졸일지라도 전쟁에 관한 일을 말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찾아와서 말하게 함으로써 군중의 사정에 통달했으며, 매양 전쟁할 때마다 부하 장수들을 모두 불러 계책을 묻고 전략을 세운 후에 나가서 싸웠기 때문에 패전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원균은 자신이 사랑하는 첩과 운주당에 거처하며 울타리로 운주당의 안팎을 막아버려서 여러 장수가 그의 얼굴조차 보기 어렵게 되었다. 또 술을 즐겨서 날마다 주정을 부리고, 형벌을 쓰는 일에 법도가 없었다.
  군중에서 가만히 수군거리기를 “만약 적병을 만나면 우리는 달아날 수밖에 없다”라고 했고, 여러 장수도 서로 원균을 비난하고 비웃으면서 또한 군사 일을 아뢰지 않아 그의 호령은 부하들에게 시행되지 않았다.’

원균 장군은 본인의 사명을 소홀히 하였다. 그의 목표인 이순신 장군을 제치고 삼도수군통제사라는 명예를 얻었기에 더 이상의 노력은 필요 없었다. 그런데 명예는 어떻게 얻어지는가? 명예는 자리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자리에 맞는 행위를 했을 때 따라오는 부산물이다. 그래서 명예만을 좇다 보면 자리가 위태로워지기 십상이다. 그러니 명예를 원하거든 자기 위치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것이 순리이다. 이 순리를 따를 때 자리와 명예는 같이 갈 수 있다.

통제사로 부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원균 장군도 이순신 장군과 동일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1579년 봄, 정유재란이 발발했을 때 권율 장군의 명령을 받았다.

 “전선을 이끌고 바다로 나가 왜적이 들어오는 길을 끊어서 막으라.”

이에 원균은 ‘수군이 부산으로 나가기에 앞서 육군이 먼저 안골포의 왜적을 공격해달라’는 장계를 올렸다. 그러나 아무도 그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과거 전라병사로 있으면서 호언장담했던 원균 장군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우리나라의 위무는 오직 수군뿐입니다. 가덕에 정박하고, 절영도 밖에서 수군의 위력으로 넓은 바다에서 시위하면 왜적은 겁을 내어 돌아갈 것이니 수군은 바다 밖에서 싸워 적을 상륙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이순신은 이를 하지 않고 있지만 나는 바다를 지키는 일에 익숙하므로 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없이 1차 출정했다가 왜적은 하나도 잡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에 권율 장군은 원균 장군에게 호통을 치며 크게 꾸짖었다. 원균 장군은 분한 마음에 술만 마시다가 홧김에 다시 출정하지만 수군 400명을 잃는 등 더 이상 싸울 수 없어 칠천량으로 물러났다. 승첩을 기다리던 도원수 권율의 격분에 곤장을 맞고 술만 마시다가 아무 대책도 세우지 못하고 최후의 날을 맞이해야 했다. 그날의 상황을 선전관 김식이 선조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15일 밤 10시에 왜선 5∼6척이 갑자기 기습해와서 조선의 전선 4척을 불 질러 전부 타버리자 우리 장병들은 허둥지둥 배를 부려 가까스로 진을 쳤습니다.
  16일 새벽에는 왜선들이 헤아릴 수 없이 닥쳐와 서너 겹으로 에워싸며 형도(칠천도 서쪽 싸리 섬) 근처에 끝없이 깔리므로 우리는 싸우며 물러나며 도저히 당적 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성 땅 추원포로 물러났는데 적의 형세는 대단했고, 우리나라 전선들은 전부 불타고 깨어졌으며 모든 장수와 군졸도 불타 죽고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신은 통제사 원균과 순천부사 우치적과 함께 몸을 뽑아 육지로 올라왔는데, 원균은 늙어서 걷지를 못하고 알몸뚱이로 칼만 차고서 소나무 아래 우두커니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다 돌아보니 왜놈 6∼7명이 칼을 휘두르며 벌써 원균이 있는 곳에 이르렀는데, 원균의 생사는 자세히 모르겠습니다.
  경상 우수사 배설과 옥포와 안골포 만호 등은 겨우 살아났으나 우리 배들이 불타는  연기가 하늘을 덮었고, 무수한 왜적이 한산도를 향해 내려갔습니다.’

  최악의 리더의 모습이며 날갯짓하며 급상승하던 리더의 추락이다. 이와 같이 명예욕은 사리분별을 흐리게 하여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해 상황을 어렵게 만든다. 그러니 리더의 길에서 명예만을 위해 달리지 말고 리더의 위치에 충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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