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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대원 Mar 25. 2020

#_코로나 한 달, 매일 22시간 아이들과 보내고 있다

프리랜서 아빠가 아이들과 매일 22시간을 보내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코로나가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다행히 국내 코로나 확진자의 추세는 크게 줄어들었지만, 북미와 유럽은 놀라운 속도로 가파른 확산세를 보여주고 있다. 전 세계의 증시가 출렁이고, 그에 맞춰 국내 증시도 어제는 폭락, 오늘은 폭등, 내일은 다시 폭락을 거듭하며 현재 시국의 혼란함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주가보다도 더 크게 출렁이고 있는 것이 있으니 바로 하루 종일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야 하는 프리랜서 아빠의 감정 기복이다.


맞벌이 부부들은 다 비슷하겠지만 방학 때도 학교를 보낸다. 오전엔 학교 도서관을 갔다가 오후엔 돌봄교실로 가고, 5시가 되면 학원을 가고 마치면 6시~7시가 된다. 회사가 아이들 학교와 가깝기 때문에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언제나 내가 책임져야 했다. 저녁 약속이 있거나 야근을 해야 하는 날은 아이들을 어머니댁에 맡기고 약속 장소로 이동했다.

그런데 코로나가 터지고, 아이들은 학원은커녕 돌봄교실조차 제대로 가기 어려워졌다. 다행히 도서관엔 거의 아이들이 오지 않아 오전 시간은 도서관을 보내고, 점심때가 되면 아이들을 데리러 가게 되었다. 그마저도 아이들이 일찍 나오고 싶어 해서 요즘은 거의 11시도 안되어서 연락이 온다. 9시 무렵에 등교해서 11시니 내가 오전에 혼자 일할 수 있는 시간은 2시간도 채 안 되는 셈이다.


같이 보내는 시간이 많은 건 참 좋다. 매일 봐도 사랑스럽고, 이쁜 아이들이기에, 2시간 만에 만나도 멀리서 걸어오는 아이들 모습이 보이면 반가워서 나도 모르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한다. 이렇게 오전의 감정상승기는 정점을 찍고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한다. 이제 점심때부터 잠들 때까지 아이들과의 평범한(?) 일상이 기다리고 있다.


어떤 날은 문제집을 가져와서 풀게 하고, 어떤 날은 책을 읽으라고 하고, 어떤 날은 보드게임을 가져와서 같이 하기도 했다. 사무실 내에서 숨바꼭질을 하기도 하고,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영화를 찾아 불을 끄고 영화상영관으로 만들어 주기도 한다. (웬만한 아이들 영화는 거의 다 본 것 같다.)

물론 컴퓨터와 아이패드로 신나게 게임을 즐기거나 자신들이 좋아하는 영상콘텐츠를 보기도 한다. 다만 아이들이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보거나 게임을 하는 건 허용하되 반드시 스스로 시간을 정해놓고 할 수 있게 하는 편이다. 어차피 친구들도 다하고, 엄마 아빠도 다 하는데, 자기들만 못하게 하면 결핍만 늘어날 거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허용하되 스스로 정해진 시간을 지키고, 더 하고 싶지만 시간이 되면 스스로 중단할 수 있는 통제력을 기르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게임을 해도 같이 하면서 재미있게 놀아주려고 노력하고, 대신 시간이 끝나면 미련 없이 다른 놀이를 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이런 스마트기기의 무서운 점은 아이들이 컨트롤하기 무척 어려운 중독성이 있다는 점이다. 그런 어른인 나 역시 똑같이 어려운 부분인데 아이들에게만 무작정 강요하긴 힘든 부분이다. 하지만 그만큼 평소에 훈련해 놓지 않으면 한순간에 몇 시간이고 아이들이 매몰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신경 써서 가르치는 편이다.


30분만 하고 이제 다른 놀이를 하려고 하면 잠시 동안 아이들의 짜증지수가 높아진다. 더불어 잠시 조용히 집중하면서 일했던 나 역시 그 집중이 깨지면서 함께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더구나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만하지 않고 계속 “잠깐만, 이것만 하고”하고 반복해서 말하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화를 내게 된다.

이때가 하루 중 가장 바닥을 찍는 순간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충분히 더 신경 써서 놀아주는 게 맞지만 상황상 그러지 못하는 거니 내가 아이들을 원망하거나 아이들에게 짜증 낼 이유가 전혀 없다. 오히려 미안해야 하는 게 맞는데, 머리로는 알면서도 실제 감정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특히 사소한 걸로 둘이 싸우기라도 하면 짜증이 솟구친다. 특히 옆 사무실에서 조용히 근무를 하고 있는 중이기에 적당한 소음은 괜찮지만, 싸우면서 언성이 커지면 이래저래 마음이 불편해지면서 나 역시 같이 감정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종종 이런 경험을 할 때마다 자기반성을 하게 된다.


나는 왜 아이들에게 짜증을 내는가!


아마 수많은 부모들이 스스로에게 되뇌었던 질문일 것이다. 큰 고민을 하지 않으면 그 모든 잘못은 아이들 탓이 된다. 그런데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안다. 아이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나. 아이들끼리 싸우면서 크는 건데, 아무런 싸움도 칭얼댐도 짜증도 어리광도 없는 육아란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럼 도대체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렇다. 나의 불편함의 원인을 아이들 탓으로 돌리는 태도에 있다. 다시 말해 아이들은 비난의 대상이 아님에도 지금 현 상황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순간 아이들을 비난해도 되는 구실이 생겨버리는 것이다. 원래 인간은 자신의 불편한 감정을 어디론가 해소하려는 욕구를 가지는데, 애당초 자기 자신의 잘못이라고 받아들이기가 힘들기 때문에 외부의 특정 대상이나 상황 때문이라고 쉽게 합리화해 버리는 것이다.


아이들이 나와 함께 있으면서 내가 일할 시간이 부족하고, 틈만 나면 '아빠 아빠' 부르는 아이들에게 친절하게 “응? 왜? 잠깐만?”이라고 자상한 아빠의 모습을 90% 이상 유지하더라도 그런 순간마다 찾아오는 스트레스가 출구를 찾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 폭발해 버리는 것이다.

아이들이 나와 함께 있는 건 아이들 때문이 아니라, 코로나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이고, 매일 어머님께 맡길 수 없어 스스로 사무실로 데려온 내 선택 때문이고, 아이들이 더 재미있게 놀 수 있게 시간을 내주지 못한 내 상황 때문인데. 그걸 스스로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니 아이들의 사소한 문제에 나의 불편한 감정을 투영해 버린 거다.


아이들은 죄가 없다.

아이들의 행동은 약간의 훈육이 필요할 수 있지만,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아빠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이들도 안다. 잠시 짜증을 거두고, 아이들에게 사과한다.

“얘들아 미안해. 아빠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잘 안돼서 괜히 너희들한테 더 짜증 낸 것 같아. 아빠는 너희들을 미워한 게 아니라, 너희들이 한 행동에 화가 났던 거야. 이제 아빠도 화 안 낼 테니까. 너희들도 아빠 얘기 들어줄 거지?”


착한 우리 아이들은 잠시 무서운 아빠였다가 다시 착한(?) 아빠로 돌아오면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예쁘고 창의적으로 놀기 시작한다. 언제나 결론은 같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진심 어린 관심과 솔직한 애정표현, 그리고 경청이 아닐까 싶다.

오늘은 오후에 일정이 있어서 어머니가 봐주셨는데, 내일은 다시 점심부터 코로나 사태 속 평범한 일상을 이어가야 한다. 내일은 조금 더 진심 어린 마음으로 아이들을 지켜보고, 한 번 더 안아주고, 내가 말하기 전에 아이들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리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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