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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대원 Sep 03. 2020

#_요리에는 순서가 있듯, 삶에도 타이밍이 있다

아내와 아이들을 보살피는 일상 속에서

아내가 암 진단을 받았다. 종합검진 후 조금 우려스럽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아닐 수도 있다며 애써 아내를 안심시킨 나였다. 하지만 결과는 걱정했던 대로였다. 코로나로 가뜩이나 움츠려 들고 힘든 날들을 보냈는데, 그건 정말 행복한 일상이었음을 알았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다. 유명한 대학병원에서 10시간이 넘는 수술과 8일간의 입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 쉬는 것도 잠시 2주 뒤부터 격주로 요양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고 있다. 아내가 집에 있으면 집에 있는 대로 병원에 입원하는 동안에는 그 나름대로 그렇게 2달 전부터 내 삶의 모든 우선순위가 바뀌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우선 여러 과일과 견과류, 두유와 흑초 등 8가지 재료를 넣어 주스를 만든다. 처음엔 재료가 다 들어갔는지, 양은 적당한지 매번 어색했지만, 어느덧 적응이 되어 척척하고 있다.

점심과 저녁은 미리 손질해서 건강하게 만들어진 식단대로 쉽게 조리해 먹을 수 있는 암환자를 위한 식단을 구입해서 때에 맞춰 요리를 해준다. 평소에 요리를 별로 하지 않기에 갑자기 아내와 아이들까지 매 끼니마다 챙겨야 하는 수고가 생겼다. 주부들이 왜 쉴틈이 없는지 온몸으로 체감한다. 


일주일 넘게 거의 매일 1-2끼 이상을 요리해 주니 아이들이 이제 아빠도 제법 요리를 잘한다면 칭찬 아닌 칭찬을 한다. 사실 평소 같았으면 싫은 이야기도 아니지만, 지금 해야 할 일은 쌓여있어도 하지 못하고 있는 답답한 상황에서 그런 이야기는 마냥 칭찬으로 들리지 않는다. 마음의 여유가 없는데, 시간도 부족하고, 잠시 일하러 사무실에 갔다가도 식사 때가 되면 어김없이 다시 와서 식사 준비를 해야 한다.


하루는 평소대로 요리를 하다 실수로 고기를 먼저 볶아야 하는데, 고기는 생각도 못하고, 야채만 한참 볶고 있다가 나중에서야 고기를 발견하고 부랴부랴 같이 넣어서 볶았다. 원래대로라면 마늘과 고기를 먼저 볶고, 양파 버섯 등 다른 재료를 순서대로 넣어야 가장 맛있다. 간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아무 때나 해도 맛이 똑같을 것 같지만, 적절한 타이밍에 간을 하고 조리를 하는 것과 요리가 다 끝난 뒤에 간을 따로 한 것과는 맛이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이처럼 요리에는 재료를 넣는 순서와 간을 하는 타이밍이 무척 중요하다.


문득 삶의 우선순위가 바뀐 지금, 허둥지둥 대고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아, 내가 일의 순서와 삶의 타이밍을 잊고 있었구나.'


일을 열심히 하고, 돈을 벌고, 성공을 하는 일련의 과정이 마치 당연한 프로세스처럼 인식되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결국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내 가족과 나의 행복을 위해 일도 하고 돈도 번다는 당연한 사실을 다시 인식했다.

무엇보다 지금은 아내를 돌보고, 수시로 일주일씩 병원에 입원하는 엄마의 빈자리를 느낄 아이들부터 먼저 챙기는 게 순서였다. 지금 하지 않으면 나중에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비록 잠시 내가 계획했던 일들이 미뤄지더라도 멀리 볼 때 그게 더 후회 없는 길임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간 속에서 조급함을 느낄 때도 있지만, 금세 마음의 중심을 되찾고자 노력하고 있다. 사람인지라 어쩔 수 없다. 무언가 인식한다고 바로 모든 것이 바뀌진 않지만, 그렇게 또 한 번 성숙해져 가는 과정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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