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니체를 한번은 진지하게 만나보고 싶을 때

알프스에서 만난 차라투스트라, 니체 (이진우/아르떼)

by 변대원

니체를 한 번은 진지하게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니체의 생애를 알지 못하면 그의 철학을 이해할 수 없다는 이진우 교수님의 말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그의 생을 더듬어가며 써 내려간 클래식 클라우드 <니체> 편을 바탕으로 쓰게 종종 그의 다른 저서들을 참조하여 풀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저에겐 무척 의미 있는 도전이 될 것 같습니다.

한편 니체에 대해 관심은 있으나 아직 접하지 못한 분들에게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발견이 되길 소망해 봅니다.


프롤로그 제목이 참 와닿습니다.

“우리는 왜 삶의 의미를 묻지 않는가”

사실 저에게는 좀 더 다른 의미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왜 삶의 의미를 묻는 자는 한낱 이상주의자가 되어야 하는가”라고요. 어쨌거나 삶의 어떤 시기에 저는 제 삶의 의미를 물었고, 그때 찾은 길을 걸어가고 있는 중이긴 합니다. 하지만 길을 찾았다는 것은 그저 시작에 불과합니다. 그야말로 그때부터 시작입니다.


니체가 말합니다.

“너는 지금 살고 있고, 살아왔던 이 삶을 다시 한번 살아야만 하고, 또 무수히 반복해서 살아야만 할 것이다. 거기에 새로운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네 생애의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운 크고 작은 일들이 네게 다시 읽어 날 것이다.”
- <즐거운 학문> 중에서


흔히 영원회귀 사상이라고 말하는 대목입니다. 영원히 내 삶이 반복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만약 니체의 말처럼 내 삶은 한 번뿐이지만, 지금 내가 보내고 있는 삶의 모든 작은 순간들이 똑같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나는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즉,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하고, 가장 나다운 삶을 살며, 자신의 운명을 온전히 사랑하는 일입니다.


Amor fati (네 운명을 사랑하라)


니체를 읽을 때 우리가 읽어야 하는 것은 니체가 아니라, 나 자신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사람들은 니체를 읽지 못하는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영원한 생동감이다.
영원한 삶이 그리고 도대체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이 중요한다.”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중에서





니체는 전복의 철학자였습니다. <우상의 황혼>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에는 진짜보다 우상이 더 많다.”


수많은 미디어 속 우상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현대를 예언한 말인듯합니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수많은 우상들 사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가짜 신만이 우상이 아닙니다. TV가 우상일 수 있고, 돈이 우상일 수 있으며, 쾌락이라는 환상이 우상일 수 있죠. 정치권력이 우상일 수 있고, 특정 브랜드나 특정 연예인이 우상일 수 있습니다. 나의 온전한 주체성을 방해하는 모든 것은 우상인 셈입니다.

니체는 그런 우상들을 철학적 사유의 망치질로 모조리 깨부숴버립니다. 그는 우리에게 위험하게 살기를 권합니다.

진정한 삶의 의미는 실존적 권력의 의지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니체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책에 따로 나오지 않는 부분입니다만, 이진우 교수님 강연에서 메모한 내용을 바탕으로 니체의 간략한 생애를 먼저 요약할까 합니다.


1849년 5살 때 니체가 가장 사랑하던 사람이자, 목사였던 아버지가 사망합니다.

1869년 25세 때 바젤대학교 정교수가 됩니다. 지금이라면 대학을 갓 졸업할 나이에 교수가 될 정도로 뛰어난 사람이었던 것이죠. 이후 학교에서 10년간 <비극의 탄생>, <반시대적 고찰>,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등으로 대표되는 니체의 초창기 철학책들이 집필됩니다.

1879년 35세 때 건강이 악화되어 3월에 제네바로 휴양을 떠났다가 5월에는 아예 희망퇴직을 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자신의 건강상태에 따라 가장 최적의 장소를 다니며 철학 여행을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니체의 후반기 철학서들이 쓰여지기 시작하며 특히 45세 때 광기에 휩싸이기 직전 1년 동안에만 4권의 책을 쓸 정도로 폭발적인 사상을 전개합니다. 그리고 마치 너무나 활짝 핀 꽃이 힘없이 시들듯 사유의 끝에 다다른 이후에 자연히 붕괴됩니다.

1889년 45세 때 토리노 광장에서 채찍에 맞는 말을 끌어 앉으며 울부짖으며 발작을 일으키게 되고, 이후 56세에 사망할 때까지 정신적 사망 상태로 지내게 됩니다.

1900년 5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합니다.


사망을 제외하고 니체 개인의 인생의 중요한 변곡점은 모두 뒷자리가 5인 해에 진행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실제로 그의 철학적 사유의 역사는 25세~45세까지 20년 동안에 모두 이루어지는데요. 끊임없이 육체의 고통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야 했던 그의 삶이 그의 사유를 그토록 깊은 곳까지 끌고 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반추해봅니다.





“내 글들의 공기를 호흡할 줄 아는 사람은 누구든 그것이 높은 곳의 강렬한 공기라는 것을 안다.” - 『이 사람을 보라』 중에서


니체 스스로 말한 자신의 글에 대한 평가를 공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이 내려다 보일만큼 높은 산에서 들이마시는 강렬한 공기를 들이마시면 그 순간 나 자신이 정화되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니체의 글도 어떤 구절이 자꾸 나를 멈춰 세웁니다.


“삶이 내게 가장 어려운 것을 요구했을 때 삶은 내게 가장 가벼워졌다.” - 『이 사람을 보라』 중에서


개인적으로 제가 무척 좋아하는 문장입니다.

운동을 할 때 늘 가벼운 것만 들면서 단단한 근육이 생기길 바라긴 어려울 것입니다. 지금보다 더 많은 근육을 단련하고 싶다면 지금까지 들었던 무게보다 더 무거운 것을 들어야 합니다. 독서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늘 읽던 쉬운 책들만 읽어서는 지속적인 성장이 어렵습니다. 반대로 너무 무거운 것만 들다 보면 금세 지치고 말죠. 나의 내면을 단련하는 것도 자신에게 맡는 “무게”를 찾는 게 순서가 아닐까 문득 생각해 봅니다.


“위대한 과제를 대하는 방법으로 유희보다 더 좋은 것을 알지 못한다 : 이것이 바로 위대함의 징표이자, 본질적인 전제 조건이다.”


니체는 위대한 과제를 대할 때 “재미있게(유희)”하는 게 최선이라고 말합니다. 조금 뒤집어 생각해보면 애당초 위대한 일이라는 건 재미있게 하는 방식으로만 이를 수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잠시 <이 사람을 보라>를 읽고 왔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봅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유로운 삶을 꿈꾼다. 자유의 그림자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구속이다. 우리의 삶은 수많은 종류의 구속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구속으로부터 해방되면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이진우 교수는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통해 우리는 자유롭게 하는 구속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구속에서 끊임없이 자유롭고 싶어 하지만, 그토록 원하던 자유를 얻는 순간 자신을 품어줄 새로운 구속을 다시 찾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느끼는 자유의 본질이 “자유로움을 느끼는 안전한 구속”이기 때문이죠.

완전한 자유는 허상입니다.

만약 멋진 자연의 경치 속에서 완전한 자유를 느끼고 싶다고 해도 그 욕망은 안전한 집과 편안한 교통편, 맛있는 식사 등이 충분히 해결된 상태에서 누리고 싶은 것입니다. 아무 구속 없는 완전한 자유는 24시간도 견디기 힘들겠지요.


니체의 말처럼 우리가 독립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기만인지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에겐 완전한 자유가 아니라, 안전한 구속이 필요합니다. 어쩌면 제가 사이책방에서 꿈꾸는 것이 “자신의 참된 자유를 만끽하게 도와줄 안전한 구속”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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