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자신의 가치는 스스로 정할 수 있다. 아니 반드시 스스로 정해야 한다. 자신이 가진 가치를 보잘 것 없게 여기는 사람은 그것을 낮게 정할 것이고, 자신 안에 놀라운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아는 사람들은 그것을 높게 정할 것이다.
도대체 내가 가진 가치라는 게 뭔가? 내가 원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일단 태어나보니 지금의 부모를 만났고, 그들과 살았고, 그들의 삶에서 인생을 배웠고, 학교를 다녔고, 친구들과 선생님을 만났고, 수많은 시험을 쳤고, 점수를 매겼고, 등수가 정해졌다. 그런 평가를 바탕으로 대학에 가고, 직장에 가고 연봉 얼마짜리 인생인지 정해진다. 원래 스펙(Specification)이라는 말은 무기나 도구의 성능을 일컫는 말인데, 자본주의에서는 사람을 스펙으로 설명한다. 그 사실만으로 우리 존재의 가치는 스펙 안에 갇혀버리게 된다.
사람의 가치는 도대체 무엇일까?
우선 1인칭 시점에서의 가치기준을 생각해보자. 나는 나 자체로 존귀하다. 나는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이 사실을 우리는 머리로 인식하고 있지만, 그것을 삶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사람은 드물다. 나라는 인간의 가치를 아무도 제대로 평가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다. 언젠가 아들녀석과 대화할 일이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돈’에 대한 개념이 생겨서 그런지 앞으로 돈을 많이 벌어서 람보르기니도 사고, 좋은 집도 사겠다는 말을 한다. 그런 아들에게 한번은 이런 이야기를 해줬다.
“석우야, 아빠한테 석우는 100억, 1조, 아니 이 세상 모든 돈을 가지고 와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야. 그게 너의 가치야.”라고.
갓 10살이 된 아이가 이해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내 아이만 돈을 환산할 수 없을만큼 가치있는 것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지금 세계 어딘가에서도 전쟁이나 테러로 죽어간 수많은 목숨들, 돌봐주는 사람들이 없어 굶어죽는 아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의 가치도 똑같이 돈으로 바꿀 수 없겠지만, 나와의 연결성이 약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무감각하게 살 뿐이다. 유독 세월호 사건에 사람들이 슬퍼하고 분노했던 이유 역시 그 일을 통해 느낀 아이들의 죽음이 남일처럼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가치는 상대적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절대적인 가치는 내 아들과 마찬가지로 돈으로 환산할 수 없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체감하는 가치, 평가되는 가치는 자신과의 연결성으로 인식된다. 즉, 한 사람의 가치는 1인칭으로 존재하지만, 2인칭으로 인식되고, 3인칭으로 평가된다.
이 사실은 내 가치를 스스로 인식하는데 아주 중요한 열쇠다. 내가 아무리 스스로 내 가치가 높다고 인식해 봐야 타인이 인정해주지 않으면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관계 속에 산다. 인간이라는 단어 자체가 그냥 사람이 아니라, “사람(人)과 사람 사이(間”)” 아닌가. 결국 가치는 관계에서 정해지고, 타인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 존재인가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지게 된다.
내 삶의 입찰가는 내가 정하지만, 낙찰가는 타인이 정한다.
“내 삶의 입찰가는 내가 정하지만, 낙찰가는 타인이 정한다.”는 명제는 그래서 유효하다. 자신의 존재 가치는 스스로 정하지만, 그것을 증명하는 것은 타인들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가치있게 여긴다. 사람들은 자신과의 연결성이 높아질수록 가치있게 여긴다. 사람들은 대체불가능한 것일수록 가치있게 여긴다. 만약 자신의 삶에서 이 3가지를 만족시킬 수 있다면 당신은 누군가에게 매우 가치있는 사람으로 인식될 것이다. 가만히 나 자신에게 물어본다.
나는 누군가에게 얼마만큼 도움이 되는 사람인가? 나는 사람들과 얼마나 연결되어있는 존재인가? 나는 어느 정도로 대체 불가능한 존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