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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대원 Apr 25. 2023

#_오늘 아침 나 자신에게 깊이 분노했다

진보를 위한 창조적 저항

창조, 그것은 저항이며
 저항, 그것은 창조다.


새벽 5시 28분, 눈을 뜨자마자 자연스럽게 해 오던 기상명상을 할 틈도 없이 경악하고 말았다.

오늘 6시에 아침 독서모임이 있어서 원래라면 4시 30분에 일어나서 씻고 출근해서 지금쯤이면 사무실로 걸어가고 있어야 할 시간인데... 늦잠을 자버렸다.


물론 집에서도 독서모임을 할 수 있지만, 집에는 내 컴퓨터가 없어서 컴퓨터가 있는 아이들 방에서 불을 끈 채 조용히 모임을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라 시작하기 전부터 마음이 불편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 마음을 가라앉히고 단톡방에 문자를 보내고, 서둘러 씻고 나왔다.


뭐, 어제 모임 자료도 다 준비해 놓았겠다, 이제 컴퓨터를 켜고 줌에 접속만 하면 되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2월초까지 모임할 때마다 썼던 컴퓨터에서 줌(zoom)이 접속이 안된다. 

이제 곧 시작해야 하는데..


다시 설치하고 하려면 너무 시간이 걸릴 것 같다. 급한 대로 먼저 스마트폰으로 열어놓은 방에 멤버들을 초대하고, 안되는 컴퓨터는 내버려두고, 그 옆에 아들 컴퓨터를 다시 부팅한다. 아들 컴퓨터에는 마침 헤드셋이 있어서 그걸 쓰면 되겠다 싶어서 좋아했는데, 아...이번에는 소리가 안 들린다. (이쯤 되니 씻고 나온 지 30분만에 온몸이 땀범벅이 되었다.)  그 외에도 자잘한 문제들이 많았지만 맥락상 다 생략한다. 어쨌거나 5시 45분부터 준비를 시작한지 30분이 지난 6시 15분이 되어서야 모임을 시작했다.  

물론 참여하신 분들 모두 너그럽게 이해해 주셨고, 모임 시간 자체는 유익하고 좋았지만, 일어난 순간부터 느낀 알 수 없는 불편함이 계속 마음속에 머물러 있었다.

그건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한 분노감이었던 것 같다.


카이스트의 정재승 교수는 어느 영상에서 가까운 사람에게 더 쉽게 화를 내는 이유는 가까운 사람일수록 내가 쉽게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시다시피 가까운 사람이 더 통제가 어렵다. ㅎㅎ) 그건 자신에 대해서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나의 자아(ego)를 관찰하는 초자아(superego)가 있는데, 통제되지 않는 자아에 대한 분노감 또한 같은 맥락이 아닐까 생각한다.


찬찬히 나 스스로 분노한 이유를 돌아본다.

1) 나는 어제 가족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조금 더 일찍 잘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자만)

2) 늦게 일어났으니 가볍게 세수만 하고, 미리 시스템 체크를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안일함)


이미 여러 번 했던 모임이고, 2달 전까지는 집에서 했던 터라 별 문제가 없을 거라는 생각 했다. 이런 '자만'과 "안일함"에 화가 난 것 같다. 물론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인데 오늘 유독 더 마음이 불편했던 이유는 불과 몇 주 전에 비슷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수요일 오전 강의에 차가 막혀서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적이 있었다. 그때 다음 주는 일찍 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도착예상시간보다 30분 일찍 나왔는데, 이번엔 버스를 환승하는 구간에서 간격이 안 맞아서 또 정시에 도착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 후로는 애매하게 가지 말고 아예 일찍 가서 준비하고 있어야지 생각하고 1시간 정도 먼저 가서 강의를 준비하고 있다. 이 때도 내 생각의 안일함을 느껴서 깊이 반성했는데, 또 비슷한 일이 생긴 것이다. 


어쩌면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지점에서 무척이나 안일하고 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닌가 다시 한번 돌아본다. 그리고 깊이 반성한다. 이제 더 이상 나 자신에게 화를 낼 필요는 없다. 나는 이 시간 이후로 그곳에 머물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더 이상 나와 상관없는 감정이나 기분에 현재를 낭비할 필요는 없다고 배웠고, 그걸 실천해 보려 한다.


전 유엔 프랑스 대사를 지냈던 스테판 에셀이 93세에 쓴 <분노하라>라는 책의 마지막에는 이런 문장이 실려있다.


"창조 그것은 저항이며, 저항 그것은 창조다."


나는 그 문장을 사회학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내 삶을 살아가는 중요한 원칙으로 이해했다. 나 자신에게 보기 싫은 모습이 있다면, 그 모습에 분노해야 한다. 그리고 강하게 저항해야 한다. 그 저항으로 인해 다시는 그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고 성장한다면 그것이 바로 한 개인의 진보이자, 새로운 삶의 창조가 아닐까?



* 매일 책 속에 좋은 문장을 나눕니다.

* 오늘 문장은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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