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런 일정의 변화로 바쁜 와중에도 30분은 시간을 내보고 싶어서 잠시 도서관에 들렀습니다.
빌렸다가 다 읽지 못한 시집을 펼쳐 봅니다. 몇 편의 시를 거쳐 이문재 시인의 지나칠 수 없는 문장을 만나고 맙니다.
내 안에도 많지만 바깥에도 많다.
현금보다 카드가 더 많은 지갑도 나다. 삼 년 전 포스터가 들어 있는 가죽가방도 나다. 이사할 때 테이프로 봉해둔 책상 맨 아래 서랍 패스트푸드가 썩고 있는 냉장고 속도 다 나다. 바깥에 내가 더 많다.
"밖에 더 많다"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시인의 통찰력에 매료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나는 내 안에만 머물러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밖에 더 많습니다.
가방 속에 들어있는 여러 종류의 볼펜과 색연필, 노트가 나입니다. 방한쪽 벽면 가득 어지럽게 꽂혀있는 책들이 나입니다. 그 책중에 몇 번을 다시 읽어도 좋아서 비닐로 포장해 두고, 책 모퉁이마다 접혀있는 낡은 책이 나입니다. 몇 년을 들고 다녀서 제법 흠집이 많이 났지만, 늘 나에게 기분 좋은 카페인을 한 모금씩 선물해 주는 텀블러가 나입니다. 지갑 속에 들어있는 신혼여행 사진과 아내의 증명사진이 나입니다. 누군가에게 선물하려고 사놓은 책 안쪽에 볼펜으로 이런저런 메모를 하고, 정성껏 포장해서 책방 스티커를 붙여놓은 비닐한덩이가 나입니다. 강의를 하러 갈 땐 늘 교복처럼 정해진 옷을 입는 걸 좋아해서 강의 날짜에 맞춰 빨아서 걸어둔 스트라이프 셔츠가 나입니다. 한쪽이 조금 더 닳아있는 구두밑창이 나입니다. 노트북 바탕화면에 딸이 만들어 놓은 하트모양의 아이콘 배치가 나입니다. 책상 옆에 올해와 5년 뒤 목표수익을 적어둔 포스트잇이 나입니다.
잠깐 떠올려봐도 참 바깥에 내가 많습니다.
무엇보다 이렇게 한 글자씩 적어놓은 글들이 나일 겁니다.
우리는 1인칭의 나는 인식하지 못하지만, 객체화된 나는 인식할 수 있습니다. 바깥에 있는 내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혼자 머리 싸매고 고민해 봐야 나는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해놓은 메모, 내가 어질러 놓은 책상, 내가 먹다 남긴 음식에서 나를 더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것을 들여다보는 것만이 인사이트(insight)라고 여겼는데, 바깥에 있는 나를 온전히 보는 것도 더 중요한 인사이트가 된다는 걸 배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