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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대원 Aug 31. 2023

#_나의 나약함에 대하여

바닥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든다.

저는 근자감이 강한 편입니다. 좋게 보면 자신감이지만, 안 좋게 보면 오만함입니다. 해보지 않은 일들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할 수는 있지만, 생각만큼 잘하기는 어렵습니다. 처음부터 잘 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습니다. 기획에 실패하고, 사업에 실패하고, 투자에 실패했습니다. 때론 관계에 실패하고, 시간관리에 실패하고, 계획대로 실천하는데 실패했습니다. 

실패라는 단어는 제 삶의 일부임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실패가 끝은 아니었습니다. 실패를 통해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조금 더 선명하게 보게 되었고, 내가 현재 할 수 있는 범위를 확인하였습니다. 내가 만나면 힘을 얻는 사람을 알게 된 반면, 만나면 시간과 에너지를 빼앗기는 사람들도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걸음마를 걷기 위해 수없이 넘어지는 과정을 '실패'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당연히 '성공'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수한 실패와 시행착오를 반복해야 합니다. 


지난 월요일(8/28) 점심식사를 마치고 오후 1시부터 지금(8/31)까지 72시간 동안 단식을 했습니다. 두 번째여서 첫 번째랑은 느낌이 다르겠거니 했는데, 역시 달랐습니다. 가장 큰 차이는 단식을 시작한 시간대입니다.


첫 번째 단식은 전날 밤 10시 무렵까지 저녁 후 간식 같은 거까지 먹은 터라 3일간을 꼬박 굶주린 상태로 보내야 했었는데요. 이번에는 지난번의 시행착오를 교훈으로 점심을 먹고 시작해서 24시간까지는 정말 평소와 너무 똑같았고요. (뭐 그 사이에 22~24시간 단식은 일주일에 몇 번씩 했었기 때문이겠지요.) 화요일 밤에 조금 배가 고팠지만, 약간의 mct 오일을 섭취하고 커피를 마시며 강의를 하고 나니 하루가 다 지나있었습니다.

문제는 셋째 날(수요일)이죠. 어제인데요. 오전까지는 괜찮았는데, 오후부터는 확실히 에너지가 떨어지고, 기운도 다소 우울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연히 스마트폰으로 보다가 아이유가 광고하는 도미노 피자를 보자 급 먹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했고요. (아이유 양을 미워하게 될 뻔...ㅋ)

그런데 더 재미있는 사건은 그러고 1시간쯤 지나서 책방에 한 젊은 커플이 도미노 피자 2판을 사들고 들어온 거죠. 1초 동안은 나를 위해 사 왔나 생각이 들었지만, 물론 아니었고요. 두 사람이 먹으려고 사 온 거였습니다. 책방에서는 취식은 금지인데, 이전에 아무 제한 없이 오픈되어 있던 8월 초의 상태를 생각하고 왔던 것 같아요. 분명 이곳 입주민일 텐데 여기서 굳이 먹는다는 건 그만한 사정이 있다는 걸로 느껴졌습니다. 마침 사람도 아무도 없었던 터라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아, 여기가 이제는 취식금지인데요. 오늘은 모르고 오셨으니 편하게 드시고 다음부터는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냄새가 어찌나 좋던지요. 물론 그들은 모르겠죠. 제가 50시간 넘게 금식한 상태라는 걸요..ㅎㅎㅎ

삶이란 이처럼 알 수 없는 우연의 일치들이 이어집니다. 생각해 보니 피자 안 먹은 지 두 달은 된 것 같은데, 어제는 도미노 피자의 강렬한 냄새가 저를 더 단련시켜 주었습니다!! (아자! 할 수 있다! ㅋㅋ)


역시 예상대로 48시간 이후가 가장 힘들었습니다. 어제는 제가 일찍 귀가해서 아이들 저녁도 챙겨야 하는 날이었는데요. 요리를 해줄 자신이 없어서 들어가면서 아이들과 아내에게 줄 저녁거리를 포장해 갔습니다.

평소보다는 조금 더 예민해져서 자꾸 저에게 뭔가 해달라고 시키는 딸에게 짜증을 부리기도 하고, 기껏 사 왔는데 먹지 않는 아들에게 투덜거리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어요. 다 제가 배고파서 예민해진 탓이겠지요.


어제저녁은 저에게 큰 깨달음을 안겨 주었습니다. 사실 첫 번째 3일 단식 때는 이번보다 훨씬 힘들었기에 깨닫고 말고 할 겨를도 없었는데요. 이번엔 실질적으로는 어제 오후와 오늘 아침에 살짝 힘든 거 말고는 대체로 컨디션이 좋았기 때문에 내 몸에 대해서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서 더 깊이 알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깨달음은 간단합니다.

"나는 참 나약한 인간이구나."


기도할 때 자주 고백하는 말이기도 했고,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머리로는 알았지만, 3일 정도 음식을 끊어보니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바닥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든다.


유영만 교수의 최신작 <끈기보다 끊기>에 소개된 말처럼 바닥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듭니다. 배고픔이라는 평범한 경험의 바닥을 체험하면서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나약한지 새삼 깨달은 것처럼 말이죠. 


삶의 가장 밑바닥이 인생을 새로 세울 수 있는 가장 단단한 기반이다. 실패가 삶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해 주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을 그만두고, 내 모든 에너지를 가장 중요한 일에 쏟기 시작했다.

같은 책에서 인용된 해리포터의 작가, 조앤 롤링이 하버드 대학 졸업식 축사에서 했던 말입니다. 비워보면 내 바닥이 보이고 그렇게 나의 바닥을 확인하고 나면 사람은 자신의 오만함을 깨닫고 겸손해질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가끔 어떤 일을 통해 저의 바닥을 체험하곤 합니다. 내 생각과 실제 현실의 괴리감을 오롯이 마주합니다. 또 한 번의 실패가 추가되는 순간이지만, 그 실패로 인해 내 삶에서 불필요한 것 하나가 제거되는 경험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참 소중한 경험입니다.


우리 삶에는 너무나 많은 타인의 지문들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지문들을 닦아내기 위해 비움이 필요합니다. 내려놓음이 중요합니다. 나라는 그릇을 끝까지 비우지 않으면 나의 바닥, 나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으니까요. 타인과의 관계가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정말 중요합니다. 다만 올바르고 건강한 관계는 나라는 존재의 주체성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을수록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숲 속의 나무들과 식물들이 다 저마다 각자의 뿌리를 내리고 자기만의 주체성을 가지고 꽃 피우면서 함께 아름다운 숲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나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은 더 큰 성장을 위한 첫걸음입니다. 


흔들려 본 사람만이 세상을 뒤흔들수 있다.


글을 쓰다 보니 단식시간이 73시간으로 길어졌군요..ㅎㅎ

이제 감사히 간단한 보식을 먹고, 저녁에는 기분 좋게 자극적이지 않은 식단으로 든든한 한 끼 식사를 해야겠습니다.



* 매일 책 속의 좋은 문장을 나눕니다.

* 오늘 문장은 유영만의 <끈기보다는 끊기>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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