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변대원 Oct 07. 2023

#_그러니까 제가 왜 아직 시작을 못했나면요.

끝없는 변명을 끝내기 위하여

오늘은 강의가 있는 날입니다. 강의는 3시 30분 부터지만 3시까지는 도착하는 걸 목표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오전부터 마음이 급했습니다. 강의는 늘 하던 거지만, 제가 강의를 준비하는 스타일상 강의 전에는 항상 2-3시간 정도 강의안을 시뮬레이션하면서 이번에 참여하는 청중에게 맞는 이야기와 소재들을 생각하고, 결론의 방향을 생각하는 식의 시간을 보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침부터 저의 여유로운 하루의 시작은 어려워졌습니다. 아내가 말하길 농협 하나로 마트에서 샤인머스킷이 할인한다고 사러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내는 혼자 다니는 걸 싫어해서 항상 저를 데리고 나가려고 하는데요. 오전에 강의 준비하러 나간다고 했더니 빨리 다녀와서 가면 되지 않나고 합니다.

생각해 보니 틀린 말이 아닙니다.


 '뭐, 빨리 다녀오면 되니까.'


이 짧은 생각 하나가 오늘 하루를 완전히 바꿀 변수가 될지 이 때는 알지 못했습니다. 이게 오늘의 첫 번째 변수였습니다. 그래서 씻지도 않고 대충 세수하고, 옷을 챙겨 입고는 집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왠 걸요. 마트로 가는 길이 막힙니다. 이 시간에 왜 차가 막힐까 생각해 보니 오늘이 3일 연휴의 시작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마트를 가는 사람도 많았지만, 일찍부터 놀러 가느라고 집을 나선 사람들도 많은 모양입니다. 두 번째 변수가 생긴 셈이지요.

그렇게 예상보다 훨씬 오래 걸려 마트에 도착하자마자, 샤인머스켓을 샀습니다. 싱싱한 샤인머스킷 3송이 한 박스가 17,900원이군요. 아이들이 무척 좋아해서 요즘 계속 사 먹고 있습니다. 넉넉히 2박스를 삽니다.  마침 이번 주말부터 저희도 휴가일정이 잡혀 있었기에 휴가 갈 때도 들고 가서 먹자고 합니다. 다음은 감말랭이를 사야 한다고 합니다. 딸이 며칠 전부터 먹고 싶다고 사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과일 코너를 돌다 보니 저기 있군요. 이렇게 두가지를 시작으로 아내는 이왕 온 김에 휴가 갈 때 필요한 것들을 조금 더 사가자고 말합니다.

잠깐 산책 삼아 과일만 사가려고 했던 일정이 휴가에 필요한 것들을 하나하나 생각하면 사는 시간으로 바뀌었습니다. 장 보는 시간이 길어집니다. 이렇게 세 번째 변수가 생겼습니다.


장을 다 보고 돌아가는 길 역시 막힙니다. 올 때보다 더 막히는군요. 아침에 후딱 다녀올 줄 알았는데, 다녀와서 정리하고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점심을 먹고 나가라고 합니다. 제가 생각해도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들은 어제 친구집에 파자마 하러 놀러 갔고, 딸에게는 감말랭이를 주고, 점심식사를 준비합니다. 밥을 하고, 미리 사두었던 우삼겹을 굽습니다. 이렇게 네 번째 변수가 생겼습니다. 식사를 다 마치고 뒷정리하고 이제야 씻고 나갈 준비를 합니다. 12시가 넘었습니다. 평소처럼 강의준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드디어 집을 나섭니다. 평소라면 갔을 카페로 이동하기에는 시간이 좀 늦었습니다. 오늘은 3번 강의 중 마지막 강의를 하는 날이라, 참여하신 분들께 뭐라도 작은 선물을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는 길에 동네 다이소에 들러봅니다. 초콜릿이나 가벼운 과자 같은 걸 사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다이소에 오니 책방에 필요한 물건들이 보입니다. 몇 개를 구입합니다. 책방 물건들을 구입하고 보니 먹는 것보다는 책을 선물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생각이네요. 독서강의인데, 책을 선물하는 게 응당 더 좋겠지요. 다섯 번째 변수입니다.


떠오르는 책이 있습니다. 중고책으로 몇 권 사야겠다는 생각에 알라딘 강남점으로 목적지를 바꿉니다. 조금 걷다 보니 강남점까지 갔다 왔다 하는데만 1시간이 넘게 소요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시간이 너무 촉박합니다. 알라딘 중고서점을 검색해서 서울 시내 곳곳의 지점들을 찾아봅니다. 가는 길에 환승하는 이수역에 마침 지점이 있군요! 좋은 선택입니다. 바로 지하철로 발걸음을 옮기고 이수역으로 갔습니다. 알라딘 이수점은 이수역 안에 있기 때문에 예전에도 몇 번 가본 곳입니다. 단연 접근성이 최고입니다. 책만 사고 바로 다시 4호선으로 환승해서 강의장이 있는 숙대입구 쪽으로 이동하면 되기 때문이죠.

그런데 막상 도착하니 제가 사고 싶던 책이 없습니다. 그렇겠죠. 중고책 특성상 항상 재고가 있는 건 아닐 테니까요. 다른 책들을 찾아봐도 마땅한 게 없습니다. 이런.... 낭패입니다. 시간은 없고 마음은 조급하니 더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 와중에 또 제가 사려고 장바구니에 넣어두었던 라이언 홀리데이의 <돌파력>이 눈에 띕니다. 책을 펼치니 마치 기다렸다는듯이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당신 앞에 뭔가 가로막고 있다. 정말이지 짜증 나고, 불행하고, 골치 아프고 예상치 못했던 문제가 떡하니 버티고 앉아, 당신을 막고 있다. 제발 일어나지 않기를 남몰래 기도했던 사태가 벌어지고 만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아, 아침부터 전혀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오늘 나에게 하는 말 같습니다. 이렇게 여섯 번째 변수를 담담히 받아들이고, 돌파력만 구매한 후 서점을 나섭니다. 그 와중에 친구의 전화가 왔습니다. 요즘 중요한 이슈가 있어서 그 친구와 해야 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가방이 무거워서 이동하면서 전화까지 하는 게 불편해서 근처 카페를 가려고 이수역 밖으로 나왔습니다. 마땅히 갈 만한 조용한 카페가 없습니다. 카페마다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카페 찾기를 포기하고 다시 이수역으로 가서 숙대입구로 이동합니다. 이제 숙대로 와서 카페 한 곳을 발견합니다. 사람이 없습니다. 얼른 커피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펼칩니다. 이동하는 중에 친구와의 통화도 거의 1시간이나 되었습니다. 이제 강의준비를 해야 해서 끊어야겠다고 말합니다. 이동하면서 전화를 받긴 했지만 그래도 통화하면서 이동하느라 시간이 더 지체된 듯합니다. 일곱 번째 변수입니다.


시간은 이미 2시입니다. 걸어서 10분 거리고, 3시 30분 강의니까 딱 1시간 바짝 준비하고 3시에 출발하기로 합니다. 어제 만들어 둔 초안파일을 열어 봅니다. 표지내용을 조금 바꾸고, 결론도 조금 수정합니다. 제 강의는 3주로 끝이지만, 이곳 청중분들은 앞으로 연말까지 지속해서 격주로 다른 강의가 있기 때문에 이후 강의를 잘 들으실 수 있도록 격려하는 멘트로 잡아 봅니다. 내용을 수정하다 보니 오늘 원래 사려고 했던 선물을 하나도 사지 못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물론 아무것도 안 드려도 모르시겠지만, 제가 아쉽습니다. 그래서 이후 정규강의 초대권을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여덟 번째 변수가 생겼습니다.


3시가 되어 강의장으로 출발합니다. 정말 다행히 1시간 안에 깔끔하게 정리를 잘 마무리해서 마음이 가볍습니다. 강의장에 도착하고 청중분들과 인사를 나누고, 준비된 강의를 시작합니다.


아침부터 시작해서 불과 반나절 조금 넘는 시간 동안에 참 많은 일들과 변수가 있었네요. 끊임없이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선택의 순간, 그리고 그 선택으로 인해 다시 바뀌는 변수들로 인해 마치 파도가 치듯이 하루가 흘러갑니다.


하루가 이럴진대, 우리 삶 속에서 벌어지는 선택과 변화들은 헤아리기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제 하루가 그랬듯, 인생은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새로운 일들이 생깁니다. 만약 제가 오늘 3시까지 강의장에 가야 한다는 확실한 목표를 세우지 않았더라면, 아마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진행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더군다나 명확한 목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8번의 변수가 생겼습니다. 아침에 잠깐 마트에 다녀와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따져봐야 뭐 하겠어요. 이미 그 길을 지나왔고, 되돌릴 수 없는걸요.


모든 장애물 속에는 더 나은 현실을 만들 기회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오늘 샀던 <돌파력>에 소개된 또 다른 문장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오늘 제가 아침부터 생긴 무수히 많은 변수들로 강의를 못하게 되었거나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다면, 아마 긴 시간 "왜 내가 오늘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설명하려고 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나도 모르게 나에게 주어진 환경을 핑계 삼고 싶은 충동을 받기 때문이죠. 다행히도 저는 오늘 무사히 강의를 했고, 사람들은 강의장에 오기 전까지 7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물론 알 필요도 없고요.


우리에겐 매 순간 현실을 창조해 낼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을 더욱 빛나게 바꿀 능력이 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나에게 더 필요한 것들로 채워가고 나를 더 성장시키기 위한 시간으로 바꿔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애써 핑곗거리를 찾을 필요 없다는 뜻입니다. 내가 할 수 없었던 원인을 찾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저 담담히 내가 잘못한 건 잘못한 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더 나은 선택을 해나가면 될 뿐입니다.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이렇게 지친 경우도 정말 오랜만입니다.

아마도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봅니다.

오늘 저녁은 느긋하게 가족들과 맛있게 식사하면서 아내와 맥주도 한 캔 나눠 마셔야겠습니다.


 


* 매일 책 속의 좋은 문장을 나눕니다.

* 오늘 문장은 라이언 홀리데이의 <돌파력>에서 발췌하였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_진짜 이루어지는 일들의 비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