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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대원 Jul 29. 2019

#_평가의 기준

'남들보다'가 아니라 '나름대로' 산다는 것

우리는 어려서부터 참 많은 비교를 받아왔다. 인간이 홀로 살수 없고, 모든 사람들이 연결되어 있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감안하면 그건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받아온 비교는 정당한 비교라기보다 사실 차별에 가깝다.


원숭이와 돌고래가 나무타기 시합을 한다면 돌고래는 아무리 노력해도 원숭이를 이길 수 없고, 수영 시합을 한다면 원숭이는 아무리 노력해도 돌고래를 이길 수 없다.

원숭이에게 “너는 왜 돌고래처럼 수영을 못하니?”라고 말하는 것은 비교가 아니라 차별이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우리는 늘 우리가 못하는 것을 잘하고 있는 누군가와 비교당해 왔다. 흔히 회자되는 엄친아, 엄친딸과의 비교다. 무자비한 차별이 아닐 수 없다. 모든 사람을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방법이니까 말이다. 오랜 시간 우리는 시험을 치고 성적을 매기고, 그 성적으로 등수를 정하고, 그 등수로 차별받아왔다. 그것이 차별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했다. 우리가 무언가를 인식할 때 그 내용보다 더 강력한 것은 그것이 전달되는 방식이다. 


그녀가 얼마나 감수성이 뛰어나고 타인의 말에 공감을 잘해주는 멋진 사람인지 누구도 중요하게 생각해 주지 않았다. 그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사람들을 격려하고, 외면당한 사람들을 남모르게 배려하는 깊이 있는 사람인지는 아무도 평가하지 않는다.

학교의 성적은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지, 또 어떤 분야는 싫어하고 못하는지 알려주는 기준일 뿐이다. 나는 학창시절 성적표에 “수우미양가” 5가지 모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나는 그런 내 성적표가 자랑스럽다. 수를 받는 과목도 있고, 가를 받는 과목도 있어야 내가 어떤 일을 해야 할 지 판단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학교 성적이 곧 그 학생 전부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버렸다. 그런 평가방식은 많은 사람의 무의식을 장악했고, 대학도, 직장도, 결혼도 눈에 보이는 외적 요소만을 평가기준으로 삼으며 비극은 시작된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의 가치기준이 ‘나름대로’ 잘사는 게 아니라 ‘남들보다’ 잘사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끊임없이 비교와 차별을 당해왔으니 최소한 남부럽지 않게 살고 싶은 거다. 문제는 그렇게 자신을 남부럽지 않게 증명한다고 해서 삶의 참된 행복까지 보장되진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생각이 확실히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남들만큼’이든 ‘남들보다’든 그런 기준은 없다. 

톨스토이의 소설 <부활>에서 주인공 네흘류도프가 상류사회의 상식에 매몰되어가는 모습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러한 무서운 변화는 자신을 신뢰하기보다는 타인을 신뢰하고 맹종한 데서 비롯되었다. 자신을 신뢰하기보다 타인을 맹종하게 된 까닭은 자신을 신뢰하며 사는 것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기준의 내가 아니라 남이 될 때 삶은 방황하게 된다. 마치 현재 내 위치를 인식하지 못하는 내비게이션처럼 말이다. 내가 서있는 자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위치를 기준으로 인식한다면 내비게이션 성능이 아무리 뛰어나고, 얼마나 속도가 빠른 자동차를 타고 간다고 해도 올바른 길을 찾을 수는 없다. 방향을 잃어버린 속도는 오히려 재앙에 가깝다.


톨스토이가 소설에서 그렇던 19세기의 러시아에서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나 자신을 신뢰하며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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