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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대원 Aug 15. 2019

#_폭력이란 무엇인가

폭력은 대상을 규정하고, 사랑은 대상을 인정한다.

폭력은 피 흘리게 하거나 죽이는 데서 생겨나기보다, 인격체들의 연속성을 중단시키는 데서 생겨난다. 인격체들이 더 이상 자신을 찾을 수 없는 역할을 하게 하는 데서, 그들로 하여금 약속뿐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실체를 배반하게 하는 데서, 모든 행위 가능성을 파괴해 버릴 행위들을 수행하게 하는 데서 생겨난다. - 에마뉘엘 레비나스 <전체성과 무한> 중에서


레바나스의 글은 어렵지만 매력적이다. 왠지 사람자체도 그럴 것 같다. 위의 글을 내가 이해한 방식으로 다시 정의하면 아래와 같다.

진정한 폭력은 물리적 행사가 아니라, 한 인격에 대한 존재가치를 지속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일체의 과정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현대사회의 폭력성을 다른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 개인이 스스로 규정한 ‘나’에 대한 정의가 스스로에 대한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존재의 고유한 실체는 한가지 모습만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 이상의 나를 가지고 있다. 고유한 실체라는 것을 한 번에 다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존재 주체가 자각한 모습은 전체의 일부일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진정한 자신의 꿈을 찾았다고 생각해도 그게 전부가 아닌 이유다. 인간의 욕망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복잡하다. 하나로 규정하기 힘들다. 그런데 자신의 꿈을 찾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꿈에 부합하는 자신만 남겨두고 나머지 자아의 존재가치를 부정한다. 꿈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스스로 폭력을 행사하는 순간이다. 가장 무서운 자기폭력은 그런 모습이 아닐까 싶다. 스스로 폭력인줄도 모르고 자행되는 폭력.

끝없이 자신의 꿈을 찾아 살고 있다고 하면서도 진정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의 실체다.


폭력의 반대말은 비폭력이 아니라, 사랑이다. 사랑은 그 사람의 존재가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태도다. 사랑이라는 명분하에 존재가치를 묵살하는 행위는 폭력이지, 결코 사랑이 아니다. 모든 사랑은 규정이 아닌 인정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폭력은 대상을 규정하고, 사랑은 대상을 인정한다. 이런 관점에서 자녀의 존재가치를 헤아리지 못한 채 그의 미래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특정 직업, 학과로 자녀를 내모는 것은 폭력의 전형일 뿐이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를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나에게 유리한 삶을 규정하고 그 삶을 위해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묵살하는 행위는 폭력이다. 사랑한다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해야 한다. 좋은 점은 물론 가장 마주하기 싫은 내 모습까지 그대로 인정해야한다. 그게 사랑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인정한 사람만이 자신을 스스로 사랑할 자격을 얻는다. 스스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삶을 실체를 볼 수 있다. 나를 향한 폭력을 멈출 때 내 존재가치는 다시 빛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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