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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대원 Dec 02. 2023

#_전라도 김치처럼

김치 때문에 과식을 해버렸다

책방으로 오는 길, 문득 분식집 라면이 먹고 싶어 졌습니다.

대학로에 내려 책방으로 오는 길에 몇 군데의 분식집이 있었기에 원래보다 한 정거장 더 지나 버스를 내렸습니다. 여유 있게 걸어오며 불이 켜진 분식집으로 들어가려는데, 안에 사람은 있는데 문이 잠겨있었습니다. 안을 들여다보니 청소하시는 직원이 지금은 영업을 안 한다며 손을 흔드시네요. 늦은 오후 시간이라 점심까지만 장사하고 정리하나 봅니다. 어쩔 수 없죠. 조금만 더 가면 작은 분식집이 하나 더 있거든요. 거기로 가봅니다.

이런, 여기도 꽝입니다. 학교 앞이라 주말에는 장사를 안 하는 것 같네요. 마지막으로 사거리에 있는 김밥집으로 향해 봅니다. 아, 근데 오늘 무슨 날인가요. 아니면 주말 이 시간은 원래 그랬던 걸까요? 김밥집마저 문이 굳게 닫혀있네요. 아무래도 오늘은 라면 먹긴 틀렸다고 생각하며 책방으로 가는 건널목을 건넙니다.

사거리를 지나다니면서 본 '전라도식당'이 문을 열었네요.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지만, 뭔가 묘한 맛집의 포스가 느껴져서 한 번쯤 가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지나가는데, 얼핏 메뉴에 "라면 4,000원, 떡라면 5,000원"이라고 적혀있는 게 보이는 게 아니겠어요? 오호! 궁즉통이라더니 이렇게 기대도 안 한 곳에서 라면을 먹을 수 있을 줄은 몰랐네요.

그렇게 테이블이 4개밖에 없는 길모퉁이 작은 식당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사장님, 라면 하나 주세요~"

라면을 주문하고, 스마트폰에 읽던 전자책을 다시 열어서 읽어봅니다.

잠시 후 하얀 그릇에 라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라면만 주고 주방으로 가신 아주머니께서 깍두기와 김치를 각각 한 접시씩 반찬으로 주십니다. 빛깔만 봐도 감이 옵니다. 시중에서 파는 김치가 아니라, 직접 담근 김치 같네요. 라면을 한 젓갈 가볍게 먹고 먼저 시원해 보이는 깍두기를 한입에 넣어 봅니다.

아... 맛있습니다. 이거 4,000원짜리 라면으로 횡재한 느낌입니다.

얼른 한 젓갈 더 뜬 후에 이번엔 소복이 담긴 김치 하나를 집어 같이 먹어 봅니다. 음, 실망시키지 않는군요.

이럴 땐 칭찬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사장님 여기 김치가 너무 맛있네요~"

앞서 3군데 가게였다면 결코 맛볼 수 없는 김치였을 겁니다. 다 문을 닫아서 이 집에 온 게 얼마나 행운인지 문득 깨닫게 됩니다. 사장님인 줄 알았던 아주머니는 직원이신가 봅니다.

"네, 우리 사장님이 전라도 분이신데, 이거 강원도에서 직접 농사지은 배추랑 무로 직접 담으신 김치예요~"라고 자랑을 하십니다. 그래서 김치찌개랑 부대찌개도 맛있다고 하시네요. 암요 암요. 김치가 이렇게 맛있으면 김치를 베이스로 한 다른 요리가 맛없기가 오히려 힘들 겁니다.

제가 연신 감탄을 하며 반찬 그릇을 비우고 조금 더 달라요 말씀드리자, 보기가 좋으셨던지 이렇게 물어보십니다.


"갓김치도 좀 드려볼까요?"

오~~ 갓김치! 이젠 4천 원짜리 라면 먹기가 죄송할 지경입니다. 조금만 달라고 말씀드렸는데, 기존 깍두기와 김치까지 넉넉하게 리필해 주시는 아주머님. 어느새 라면 면발은 거의 다 사라져 가는데 반찬이 너무 많이 남아버렸습니다. 이 맛난 김치는 밥이랑만 먹어도 훌륭한 한 끼일 텐데 남길 순 없는 노릇입니다.

공깃밥을 하나 추가합니다.

"여기 김치가 너무 맛있어서 밥을 안 먹을 수가 없네요"라고 너스레를 떨어 봅니다.

아주머니가 흐뭇하게 웃으십니다. 음식장사하시는 분들은 손님이 우리 가게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는 게 기쁨이신가 봅니다.



남은 라면 국물에 밥을 말아서 남은 3종류의 김치와 함께 맛있게 한 끼를 마무리했습니다.

집에 맛있는 김치를 받아오거나 김치를 담고 적당히 잘 익었을 때면 종종 김치를 먹으려고 라면을 먹기도 하는데, 이젠 그럴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냥 여기 오면 되니까요.

이렇게 또 하나의 맛집 리스트가 추가되네요. 전라도 음식 잘하시는 사장님이 직접 담근 김치는 이렇게 저를 사로잡아 버렸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한식집을 평가하는 기준이 바로 "김치"인데요. 반찬으로 김치가 먼저 나왔을 때 김치가 맛있었는데, 음식이 맛없는 경우는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 집은 대체로 메인메뉴가 아닌 걸 시켜도 맛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쩌면 한식의 가장 기본이 되는 반찬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 기본적인 것들까지 맛을 챙기는 집이 메인요리를 맛없게 할 가능성은 낮으니까요.


나는 내 삶에서 누군가에게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는 '전라도 김치'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독서강의나 글쓰기 강의가 누가 먹어도 만족할 수 있는 "전라도 김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쓰는 소소한 글들이 쭉쭉 찢어서 보쌈고기에 돌돌 말아 감칠맛 있게 먹을 수 있는 겉절이였으면 좋겠습니다. 가치는 그럴싸해 보이는 곳에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하나씩 채워가며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새삼 느낍니다.


어쨌거나 앞으로 자주 갈 식당이 한 군데 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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