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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이아 Sep 13. 2022

언어의 '오독' 그리고 다양성의 '위기'

'다양성 교과'를 조심스레 제안하며 


"언어의 오독이 사회적 쟁점으로 떠올랐다. 2019년 '명징(明澄)'과 '직조(織造)'로 시작된 구설은 2020년 '사흘', 2021년 '금일(今日)'과 '무운(武運)'을 거쳐 최근 '심심(甚深)한 사과' 곡해 논란으로 커졌다." (하단의 한국일보 기사 중에서)


'징후적'이라는 말의 남용을 경계하는 편이지만 수년 전부터 사회의 제반 영역에서 교육문제가 제기되는 방식이야말로 실로 징후적이지않나 싶습니다. 최근 문해력과 리터러시에 대한 이슈가 터져나오는 계기들이 한 예입니다. 


시스템과 구조, 중장기 추세 및 거시 지표에 대한 지적, 교육의 당사자인 교사들의 오랜 증언과 주장은 좀처럼 사회 전체의 관심을 끌지 못 합니다. 이에 비해 '심심한 사과'를 둘러싼 갑론을박과 같은 일화는 조롱과 탄식, 갈등과 비난을 타고 삽시간에 전사회적 의제가 됩니다. 진단이 쏟아지고, 칼럼은 줄을 잇습니다. 소셜미디어에는 관련된 포스트가 넘실댑니다. (그 와중에 저도 짧은 글을 하나 썼습니다. 첫 답글로 남겨 놓습니다.) 


물론 이런 계기를 통해 많은 사람들의 의견과 지혜가 모이고 근본적인 문제들을 파고들 수 있는 정치적, 제도적, 문화적, 학술적 틀이 만들어진다면 좋겠지요. 하지만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단기간의 집중된 논의가 사회적 역량으로 쌓이지 못 하고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이 쏟아지듯 흩어져 버리는 느낌입니다. 


일전에 쓴 쪽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저는 현재 한국사회를 관통하는 핵심어로 '다양성'을 꼽습니다. 교육의 제반 영역에서 다양성에 대한 논의가 시급하다고 믿습니다. 이에 다양성을 새로운 교과로 도입하는 실험을 해 보면 어떨까 조심스레 제안합니다. 교과를 나선형으로 구조화하여 초중고 과정에서 다양성에 대한 관점과 이론, 사례와 실천방안을 이야기해보는 경험을 해 보는 것입니다. 크게 보면 다문화, 다언어, 다매체, 불평등, 고령화, 기후위기의 시대의 시민 민주주의 교육의 한 영역이 되겠지요. 


며칠 전 불광천에서


적어도 저의 경우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가장 힘든 것은 지식의 소화와 전달이 아니라 저와 꽤나 다른 생각과 지향을 가진 학생들과 평등하게 대화하며 더 나은 사회를 짓는 비전을 만들어 나가는 일입니다. 혐오와 차별 없는 교실문화를 지향하면서 (저의 협소한, 혹은 '꼰대스러운' 관점에서 보기에) 기계적 공정에 대한 강력한 신뢰를 가지고 있고, 젠더와 기후위기, 계급 등의 이슈에 대하여 기성권력의 이해를 충실히 대변하는 듯하며, 유럽과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가치와 체제를 우월하다고 판단하는 이들과 열린 마음으로 소통하는 것이 무척 힘듭니다. 


물론 더 깊은 논의와 소통을 통해 서로가 그리 다르지 않음을, 함께 궁리하고 도모할 수 있는 일들이 있음을 확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순전히 제 역량의 부족으로 그러지 못 하는 경우가 종종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왜 이럴까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가장 큰 이유야 말할 것도 없이 교수자이며 안내자로서 제 역량의 한계일 것입니다. 이에 덧붙여 또 다른 이유를 생각해 보자면 저도 학생들도 철저히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과 소위 '어려운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온라인에서 익명 혹은 익명에 가까운 실명으로 이야기할 일은 종종 있지만, 학교교육의 테두리 안에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며 사회의 가장 긴급하고도 중대한 이슈에 대해 차분하게 살펴보고 주요한 과학적, 인문사회과학적 논의에 기반하여 진솔한 대화를 나눌 일은 없었던 것이죠. 


네, 이것도 너무 뜬구름 잡는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결국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제 수업에서 만나는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며 다른 가치를 탐색하는 일이겠지요. 지난 학기에 이어 이번 학기에도 다양성과 탈식민, 권력 등의 주제와 응용언어학 및 영어교육을 연결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생각보다 어렵네요. 그래도 계속 걸어갈 수밖에 없고요. 


그런데 왜 느닷없이 이런 선문답같은 말이 떠오를까요? 


"사랑하면 알고 싶고, 알고 싶으면 찾아보게 되고, 찾다 보면 함께한 시간이 쌓이는 법이니, 이제 상대는, 더불어 너 자신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


본 주제와 관련하여 간만에 짧은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https://n.news.naver.com/article/469/0000696403


'심심한 사과' 등을 둘러싼 반응에 대해 단상을 포스팅한 적이 있습니다. 

https://brunch.co.kr/@literacy/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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