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이에게

by 가이아


이곳에 온 지 3년 반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세월이 빠르다는 그 흔한 말이 거역할 수 없는 진리로 다가옵니다. 뭔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정작 손에 쥐어지지 않는 것들이 내 몸을 관통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다지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가끔은 '왜 이 고생을 하고 있나'하는 바보같은 생각도 듭니다.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공부를 한다 해서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다른 일들보다 더 낫지도 더 못하지도 않은, 그냥 평범한 삶이라는 것을. 그래서 가끔 공부하는 게 무슨 엄청난 고해를 지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면 화가 나기도 합니다.


채움을 위해서 이 곳에 왔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나에게 요구되는 것은 비움입니다. 많은 것을 가지지 못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가진 것들을 제대로 셈하지 못해 불행한 것임을 깨닫습니다.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다고 느끼지 않아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누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저를 슬프게 합니다. 조금 더 알아야 말할 수 있다거나 조금 더 가져야 나눌 수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려 애쓰고 있습니다. 삶은 언제 그칠지 모르는 경주. 그치지 전까지는 달려가려 합니다.


당신에게 부끄럽게도 아직 저는 제가 가는 길이 저에게 가장 맞는 길인지 알지 못합니다. 배우는 것이 의미 없다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언어를 탐색하는 일이 시시하다고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제가 생각하기에 제가 먹는 밥만큼의 가치라도 생산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는 말입니다. 자본주의의 대차대조를 무지하게 싫어하는 저이지만, 제 존재를 지탱하고 있는 수많은 물적 정신적 공간적 시간적 자원들을 생각하면 제 몸뚱아리 하나가 부끄러워 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허허 웃으면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보다 체중이 줄었습니다. 한 2-3 킬로그램 빠진 것 같습니다. 처음 이 곳에서 지낸 학기보다는 잠을 조금 더 잡니다. 어떻게 버텼는지 카페인에 의지하여 한 학기를 보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보다 '타인의 언어'로 말하고 쓰는 것은 조금 더 편해졌습니다. 여전히 영어는 그들의 언어로 느껴지지만 가끔 내가 이 소통의 도구를 통해 가르치고 배우고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깜짝 깜짝 놀라곤 합니다. 잘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가끔 내가 내가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서 그런 것이지요. 정말로 그렇습니다.


작년부터 소셜 네트워크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사실 소셜 네트워크 상의 지인들은 '고스트'같은 측면이 있답니다. 분명 존재하지만, 언제 사라질 지 모르는, 그리고 사라지고 난 뒤에도 그닥 가슴이 아프지도 않게 되는, 그런 관계. 사실 함게 키워놓은 마음이 없으니 상대가 사라져도 아플 가슴이 없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또 몇몇 분들과는 소중한 인연을 키워가고 있습니다. 같이 스카이프로 책을 읽기도 하고, 몇몇이 함께 노래를 불러서 그걸 하나의 파일로 만들어 공유하기도 하고, 긴 토론을 하기도 하고, (제가 더 받긴 하지만) 선물과 카드를 교환하기도 합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과의 우정과 연대. 이게 요즘 저의 화두 중 하나가 되었답니다. 그런 관계의 소중함과 힘을 깨달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정말 너무나도 많이 받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감히 저를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고마운 게 너무 많습니다. 감사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도 가끔씩 치밀어 올라오는 불평의 싹을 보면서 나란 인간은 정말 구제불능인가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여전히 건반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찬양팀 분들은 프로페셔널 밴드 멤버 만큼이나 대단한 분들입니다. 전공자가 대부분이기도 하고요. 빼어난 연주 실력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성품이 부드럽고 온화한 분들이라는 게 저에게 큰 감동입니다. 프로로 음악을 하시는 혹은 하셨던 분들이 꽤 되는데 그런 분들이 이렇게 아름다운 팀웤을 이루는 것을 보면서 참으로 뭉클합니다. 작년 12월에는 처음으로 주일 예배를 찬양팀 주관으로 드렸습니다. 오랜만에 "곡을 따서" 연습도 하고, 주말에 몇 시간씩 같이 합주를 하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예배를 마치니 예전에 교회나 학교에서 공연을 하고 나서 느꼈던 허전함이 몰려오더군요. 김현철의 "연극이 끝나고 난 뒤" 들으면 딱 느껴지는 그 기분 아시죠?


논문은 이제 시작 단계에 있습니다. 제가 속한 과는 보통 2년 정도를 논문 작성에 씁니다. 데이터를 모으고, 분석하고, 결과를 내고, 논문을 쓰는 데까지 2년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 것이지요. 물론 박사 과정이라는 것이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타임라인을 가지고 있어요. 언제 데이터를 다 모을 수 있을지, 언제쯤이 되어야 제대로 된 분석을 마칠 수 있을지, 또 그걸 가지고 어떤 저널에 기고하게 될 지...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아요. 다만 지금은 앞으로 2년 안에 마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어떤 논문이냐고 물으신다면... 영어로 글쓰기를 배우는 사람들이 어떻게 글쓰기 실력을 발전시켜 나가는가에 대한 질적 연구라고 생각하시면 될 거 같아요. 물론 실제 논문은 이 주제를 훨씬 더 좁은 틀에서 다룹니다. 구체적으로는 여기 미국에 나와 있는 언어학/교육학 석박사 과정 학생들의 쓰기 발달을 보는 것이지요. '인지언어학', 그리고 '사회문화이론'이라는 틀을 가지고 학술 리터러시 발달을 보는 작업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분명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적다고도 할 수 없는 나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둘째 가족은 OO이를 아름답게 키워가고 있고, 막내 동생과 제수씨는 둘째 OO이를 맞았습니다. 저의 이상한(?) 습성 덕에 대부분의 오랜 친구들과 남자 사람이건 여자 사람이건 끈을 놓지 않고 있고, 이곳의 과 친구들이나 교회 친구들과도 즐겁게 살아갑니다. 약 두 해 전부터는 몇몇 학부 친구들에게 "야매" 피아노 레슨을 하고 있습니다. 영작문수업에서 만난 학부생들과도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참 좋구요. 나이를 따지지 않고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게 저는 정말 좋거든요. 정말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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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늘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겨울이 시작되고 한 달 여 날씨가 푸근한 편이었는데, 이젠 다시 전형적인 스테이트 칼리지의 날씨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눈이 이틀 연속 오는. 바람이 세차게 불고 땅은 좀처럼 녹지 않는 날씨입니다. 미국의 최첨단 도로 관리 방식인 '염화칼슘 땅에 쌓일 정도로 뿌리기'를 또 다시 목격하고 있습니다. 창가에서 밖을 바라보는데도 마음이 시립니다.


그래서,

당신이 그립습니다.


아주, 아주.

깊이, 깊이.


Peace,

성우 드림


(2011년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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