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이 된 사람들에 대하여

추천사가 불러온 제주의 추억

by 가이아


2003년 어느 가을날, 폭풍이 휩쓸고 간 제주를 걷고 있었습니다. 한 마을에 들어서자 처참한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시멘트 벽돌로 된 담장이 무너져 내려 길을 반쯤 덮고 있었죠. 아픈 마음을 안고 발걸음을 옮기다가 흠칫 놀랐습니다. 현무암을 쌓아 올린 담장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튼튼히 서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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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지나가던 주민께 여쭈었습니다. “시멘트 벽은 다 무너졌는데, 얘는 튼튼하네요.” “그게 벽에 바람이 통해서 그래. 이리저리 틈이 있잖아.” 그분의 말을 과학적으로 검증 가능할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후 ‘틈’은 제 삶의 가장 중요한 메타포가 되었습니다. “이리저리 틈이 있는" 사람들 곁에 서고 싶었고, 누군가의 삶에 작은 틈이 되고 싶었습니다. 제 마음 속에도 바람과 햇살, 새들과 나비들이 오가는 틈을 만들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그 메타포대로 살아오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틈이 된 사람들을 동경하고 응원합니다. 그것이 제도와 구조에 균열을 낸 것이든, 삶의 취약성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일이든, 다른 세계를 엿볼 수 있는, 그 자체로 예술이 된 삶이든, 일상의 상처를 덤덤한 말로 표현하여 삶과 말 '사이'의 긴장을 보여주는 일이든 말입니다.


오랜 지인이면서 동료 연구자인 필자 선생님의 원고를 읽고 짧은 추천사를 썼습니다. 사이와 경계에 선 말, 문화,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가 날것 그대로 전해지는 책이었습니다. 숙제를 끝내고 나니 제주도에서 만났던 이 돌담이 떠올랐습니다. 소셜미디어이라는'꽉막힌' 공간에서도 '틈'이 되어 다른 세계로 가는 길이 되어 주시는 분들께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 오후입니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배움의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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