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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단 Dec 24. 2020

리단의 얼굴을 가져버린 리단

정신병자의 유년

조증인 사람의 뇌는 조증이 아닌 사람들의 뇌와 다르게 움직인다. 당연하다. 그들은 사고를 하지 않는다. 그들은 연상한다. 아니 상상한다. 아니 그들은 팝업 북과 같다. 책장의 수평을 보란 듯이 무너뜨리는 세계다. 감탄스럽다. 그리고 그는 다음 페이지를 넘기면서 생각한다. ‘이다음은 무엇이 나올까?’ 그는 이미 직전에 본 감탄을 잊었다. 조증엔 수많은 연상이 속수무책으로 튀어나온다. 그것은 처음에는 자신에 관한 것이었다가 자기와 관련이 없던 것도 곁들여지다가 어느 순간 알 수 없는 세계로 잠입한다. 그곳이 소위 말하는 정신증의 세계로 흔히들 이쯤 되면 세상 사람들은 뇌가 망가졌다고 여긴다. 적어도 결함이 생겼다고. 그러나 우리는 그런 망가진 뇌로 많은 일을 한다. 도서관의 어느 책에 누가 줄을 쳤다고, 하이라이트를 쳤다고, 귀퉁이를 접거나 모서리가 닳았다고 그 책이 덜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결함은 우리의 흔적이다.

 

정신병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의례처럼 자신의 과거를 더듬어 어느 순간, 순간들을 찾아내고야 만다. 그것은 자신의 정신병의 기원이 되는 곳일 수도 있고, 아무 상관없는 옛 기억이거나 흐릿한 정보일 수도 있지만, 떠올린 순간 절대 잊을 수 없다. 그 순간 우리는 과거의 자신에게 정신병을 부여하며, 현재의 자신에 이바지한 그 어린이를 보면서 상념에 젖는다. 그렇게 누구나 박탈감을 느끼며 병과의 동행을 시작한다.

 

그리고 나처럼, 인생 서사에서 큰 불길함 없이 자란 아이도 충분히 정신병의 문을 연다. 나는 누구나 다 그런 줄 알았다. 아니 누구나 그렇기 때문에 나만 좀 더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천사와 말할 수 있다고 수녀님에게 귓속말로 얘기했던 9살의 나는 좀 더 뒤엔 하느님 아버지와 직통으로 대화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하느님 아버지는 나와 결혼할 애를 점쳐 두었다고 했다. 그 애는 주공아파트에 살았다. 실은 그 고장의 초등학교 절반 애가 주공아파트에 살았다. 우리는 그곳에서 다른 무리들과 어울려 조그만 비행들을 저질렀다. 거지들에게 돌을 던지다 쫓겼고, 양송이를 재배하기 위해 쌓아 둔 통나무로 아지트를 지었다. 폐가에 무단 침입을 하고 전면 유리를 깨서 떼 지었던 무리들이 순식간에 송사리 떼처럼 흩어졌다. 나는 무리의 유일한 여자애였는데, 그건 별로 개의할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가 5학년 때까지도 학급에서 제일 축구를 잘하는 사람은 박소영이라는 여자애였기 때문이다. 나는 축구를 못하고 대신 개나리를 다듬어 활을 만들어서 전쟁놀이를 했다. 그때 운동장의 반대편에서 축구를 하는 박소영을 몇 번 곁눈질로 엿보며 느꼈던 것이 무엇인지는 조금 불분명하다.

 

그곳이 내 고향이었다. 서울 토박이들을 만나 ‘너는 고향이 있어 좋겠다’라는 말을 듣고 종종 생각하게 되는 것이지만, 고향에서의 나로 줄곧 성장했다면 별로 적합한 형태는 아니었을 것이다. 여자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 자신의 인생을, 어떤 자식을 낳을까 특히 아들을 어떻게 키울까 하고 생각하는 것은 그다지 권하고픈 라이프스타일은 아니니 말이다. 내 위로 연년생인 형제가 있었고 젖먹이들을 할머니가 돌봤다. 내가 걷기 시작하자 독실한 천주교인인 할머니는 나를 업거나 아기 걸음의 느린 시간을 함께 걸으며 자동차 표지판의 글자를 읽어주었다고 했다. 그렇게 두 살에 숫자를 깨쳤다고 하는데 과장을 보탰든 아니든 모든 읽기를 빠르게 익혔던 것으로 보인다. 유년기를 장악하고 있는 것은 할머니다. 그리고 성당이다. 할머니 방에는 프란체스코 교황이 걸려 있었고 성상으로 이뤄진 제단과 언제나 초를 태우기에 길게 이어진 촛농이 아름다운 를 ㅣ던 초가 있었고 할머니는 새벽 미사에 가기 전에 새벽기도를, 저녁 미사를 다녀온 후에 취침 전에 언제나 기도를 드렸다. 벽면 하나를 메우는 자개장과 자개 서랍, 그리고 촛불이 일렁이며 할머니의 낮고 이어지는 고장 특유의 느린 음성을 들으며 잠을 잤다. 외가 문중은 그 시골보다 더 시골, 금사리에 터전이 있었다. 100년도 더 된 성당이 있는 그곳은 집성촌 특유의 낮은 담장이 이어지고, 언젠가 대여섯 살 때 큰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갔던 상가엔 상자가 쓰인 등에 흰 차일에 두 칸 기와집이었다. 그곳에서 내 팔뚝만 한 커다란 빗을 보고 기겁했던 것이 생각난다. 우리 할머니는 본디 첩으로 혼인이 들어온 걸 죽어라 마다하고 지금의 할아버지와 쌀 한 말이고 결혼했다. 할아버지는 양잠업에 종사하다 마침 사양산업으로 문 닫는 처지가 되어 백수가 돼 낳다. 할머니는 읍내에 사거리에 작은 점방을 내고 담배랑 물건들을 팔았다. 아들이 대학 가는 게 소원이었던 할머니였으나 아들들은 다들 공부엔 젬병이었다. 유일하게 엄마만 도회지로 대학을 갔다. 아무튼 그래서 그 세계에서는 똑똑하거나 공부 잘하는 게 그리 중요하지 않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 상장을 타월 때 공부 잘해서 주는 상보다 덕행상 같은 것을 훨씬 좋아했다. 그러니 나는 공부를 안 하고 맨날 놀러 다니고 놀 궁리만 하고 1학년 수업에선 부등호 구분을 못했고, 좌우 구분을 못 헀고, 3학년 때는 나누기를 못했고 나머지 수업을 듣고 일기도 맨 안 써가서 나머지로 30줄을 써야 했다. 2학년 때는 언니가 썼던 일기를 훔쳐서 이름을 바꿔 쓰고 냈던 적도 있다.

 

고향의 이야기를 쓰는 건 즐겁지만, 고향은 가끔만 가는 게 좋다. 나의 원형이 존재하는 것 같으면서도 순식간에 사라진다. 내가 알았던 곳들이 하나씩, 하나씩 지워지지만 동시에 그와 대비해서 기억하고 있는 면모들이 더욱 세부를 갖춘다. 마치 없어지기 전까지는 무의식 속에 있었던 것처럼. 나는 아주 오랫동안 성당에 다녔고, 견진성사도 받았고 고해성사도 매주 했지만(매번 같은 패턴이었다. 헌금 1000원을 타 오면 700원은 아이스크림 사 먹고 뽑기하고 300원만 내서 잘못했습니다 빌었다) 얼마 전까지는 그 역사가 중요하게 작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줄곧 들었던 합창을 낀 오케스트라 환청을 고려해보면 나는 아주 아기일 때부터 성가 합창단의 영향을 받아왔던 것 아닐까? 내 과거에 미약하나마 뿌리를 두고 형성된, 혹은 조합된 환청이 아닌가? 하는 연상이 돌연 일어나고 그것은 수면에 닿은 돌처럼 잔잔한 물결을 이고 가라앉았으나 술렁이기 시작한 마음을 진정하기 어려웠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의 환청이 어디서 오는가? 아니 왜 그것은 그 소리를 택한 것인가? 환청과 일반적인 소리의 차이를 환청을 겪는 사람들은 둘을 구분하려 무진 노력한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내게 환청은 파동이 아닌 약간 다른 공간감을 준다. 환청을 들을 때 나의 감각이 어떤지 가장 유사한 느낌을 찾자면 노이즈 캔슬링 기술에 가깝다. 환청은 내게만 들리는 게 아니라 내게 더 잘 들린다.

 

고향은 내가 초등학교 마지막 학년에 이사하게 되면서 떠났다. 그 뒤로 줄곧 새로운 고장에서 살았다. 새로운 고장은 고향보다 인구가 4배는 많았고, 중심지도 구시가지, 신시가지 둘로 나뉘어 있었으며 초등학교 학급은 3배나 많았다. 그리고 아무도 운동장에서 놀지 않았다. 터전히 시골에서 도시로 완전히 바뀌어버렸고 변화가 너무 많고 빨랐다. 그것은 동물처럼 천방지축으로 싸돌아다니고, 또래 아이들도 아직 사회화된 형태가 아니라 동물적인 직관으로 무리를 형성했던 지난날과 다른 인간이 되어야만 살 수 있는 구조였다. 그러나 다 싫었다. 옷을 사러 가서 이것저것 입어보는 것, 신발을 고르는 것, 여자애들과 대화하는 것, 그렇다고 남자애들이 제 무리에 나를 끼워주는 것도 아닌 것, 메일, 메신저, 온라인 게임, 편의점, 팬시 문구 숍, CNA나 마니또 같은 곳, 우정 사진을 찍는 것, 친구들과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함께 밥을 먹으러 가는 것 등은 모두 나를 정말로 지치게 했다. 내가 중학교 1학년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손윗형제는 부모님이 외박하실 때 친구들을 불러서 술판을 벌이고 ‘바람난 가족’을 몰래 보았다. 덩달아 나도 컵에 소주를 가득 부어 먹은 상태로 메이플 스토리를 했다. 내가 본격적으로 사회화된 인간으로 거듭나게 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일로, 처음 여자인 친구를 사귀게 된 사건이었다. 물론 그전에 애매한 단발이었던 머리를 쇼트커트 해서 훨씬 외양이 마음에 든 상태였다.(그전까지는 헤어컷에 대해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 그냥 신체 전부를 싫어하고 건드리거나 변화하는 것도 위협적으로 느꼈다.) 그리고 인생은 요동쳐 그때 십 대를 바친 여자를 만나며 한 명의 인간이 되는 일을 완벽하게 마친다. 첫 친구, 첫사랑. 게임 끝 아닐까?

 

내게 목공 기술을 가르쳐준 아저씨는 일종의 아드레날린 중독자였다. 여치처럼 이 취미 저 취미를 골라 뛰어다녔다. 취미를 발전시켜 직업으로 만들고 그렇게 직업을 주렁주렁이고 다녔다. 과거 학생운동 전적이 있는 이 분은 연대사태 때인지 어느 때인지 아무튼 한 계파를 이끌고 경찰을 피해 산행을 강행 산을 돌아서 진입했던 경험을 이야기 해준 적 있다. 물어보지는 않았으나 과거 ‘학교’에 다녀온 경험이 있고, 취미들과 본업과 갖가지 부업들은 그의 생계를 돌봤으나 언제나 그 일들 말고 새로운 일을 하려 하나의 일에 달 되면 떠고, 떠나고를 반복은 경향이 있었다.

 

내가 아드레날린 중독자처럼 변하기 시작한 때가 바로 중학교 2학년이었다.

 

 

며칠 전 이사를 했다가 탈진하고 지금에 이르렀다. 대학 시절 종종 병이 솟구치면 그 수업이나 과제를 펑크 내곤 했는데, 그로부터 몇 해가 지난 지금도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이 자못 수치스럽기 짝이 없다. 나는 스트레스나 고통을 감내하는 역치가 높지만, 한계를 넘어버리면 다른 인간이 된다. 모든 감각과 정보들을 적대적으로 해석하고, 과잉된 방어체계에 돌입하며 매우 폭력적인 성향을 띤다. 타인과의 심지어 사물들과의 접점에 적의가 도사리고 있으며, 심해질 경우 흔히들 피해망상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내 망상은 주로 추적하고 있다, 감금하려 든다, ~하지 못하게 한다, ~하는 것을 방해하려 한다 등으로 흘러들어 가며 그 면면을 제대로 분석하면 ‘그럴 이유가 없다’라는 결론이 도출되나 그런 식으로 내려지는 결론은 부정하고 다시 시뮬레이션을 돌려 내 사고가 내리는 결론에 부합하게 된 결괏값만 수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일상이기보다는 스트레스가 한계 이상에 도달했을 때, 자신의 불가피함을 호소하는 반응이므로 생각이 옳다, 그르다를 가지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스트레스 상태를 불러일으킨 어쩔 수 없는 환경 내에서 나름 자신을 구성할 수 있는 예시들을 제시하고 그를 북돋아주면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도 그럴지는 모르겠다. 나는 타인의 영향을 잘 받고, 타인을 궁금해 하지만 동시에 굉장히 내밀한 사람이고, 내부의 구동력을 전적으로 자신에게서 끌어오려는 경향이 있다. 고통과 스트레스에 매몰된 상태에서 자기 자신은 썩 도움이 되지 못하지만, 타인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일그러져 있는 상태에서 타인이 내게 보내는 신호들은 모두 적대적으로 비치며 적대적으로 배치된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적대성에 대해 발설하지 않는다. 그것이 사실이 아닌 것을 알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에서 기인한 기묘한 고통은 내 쪽으로도 표출되지 못하고, 타인에게 배출되지 못하고 일그러진 채로 빙빙 돌다가 사라진다. 그것이 어딘가에 누적된다든지, 해묵은 먼지나 더께처럼 남아있는다고 생각하면 견딜 수 없다.

 

 

우리는 누구나 이기적이고, 자의적인 선택을 내린다. 특히 자신의 서사를 만드는 일은 사건을 기억으로 만들고 기억을 조립하고 분해해서 자신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일이다. 다분히 개인적인 작업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정상성과도 잘 맞물려야 하며 설사 내면에 한으로 남더라도 그것이 반사회성과 이상성을 피해 발휘되어야 한다. 자신이 사회적인 인간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정신질환으로 사회적 정상성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는 이들은 자신이 최선을 다해도 사람의 거죽 노릇 정도밖에 못한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이런 불가능을 타인이 결코 알지 못하리란 것도 안다. 그래서 우리는 더 많은 보장구들이 필요하고, 더 많은 지원 조치가 필요하다. 하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정신병자들에게 병의 진행, 병의 기형을 막아주는 조치를 취할 수 있는 보호자는 자신뿐이다. 참고, 감내하며 위태로운 균형을 있어갈 뿐이다. 설사 평범하게 보이는 인물일지라도 그의 이면엔 부지런히 돌아가며 투병 쪽을 계속해나가는 그의 군대가 있다.

 

우리는 대체적으로 취향이 확고해지는 어린 시절을 보낸다. 성인의 눈에서 보면 기이한 취향도 어린이들에게는 절대적일 것이다. 특정 색을 선호한다 든 자, 노랫말이나 가사 같은 것 말이다.  나는 무엇을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는 아니었다. 딱 2번 졸랐는데 6살 때 유치원 실내화로 앞부분이 강아지인 털 슬리퍼를 사달라고 했다가 기각당했고, 10살 때 두 발 자전거를 사달라고 했다가 오해를 사는 바람에 엎어졌고, 같은 나이 때 여아용 운동화가 아니라 남아용 포켓몬스터 검은색 신발을 사달라고 했는데 그때에는 비로소 부모님도 비로소 이 어린이의 취향을 일부분 수긍했던 것 같다. 부모님에게는 오랫동안 ‘남자가 되고 싶은 모양’으로 걱정을 샀는데 초등학교 5학년 담임 또한 매한가지 걱정이 있었는지 친한 여자 친구가 없(어보이)는 나를 우려해 따로 상담을 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나는 남녀의 젠더 롤에 관심도 없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남자애들과 우우 떼 지어 몰려다니며 개판을 치면서 동시에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동생을 모성애를 발휘하듯 살뜰히 보살피는(갖고 논다는 표현이 맞을 텐데 어른들 눈에는 기특해 보였을 것이다) 서로 다른 극과 극 사이를 오갔다. 나의 일관된 관심사는 동물 인형을 사 모으고 학교 앞에서 병아리를 팔면 꼬박꼬박 사서 닭으로 만드는 것, 외갓집 개가 새끼를 배고 낳으면 이름을 지어주고 노는 것, 쓰레기를 태우는 것... 당시엔 모두 집 앞에서 쓰레기를 태우고, 남은 음식은 동물을 주거나 땅에 묻었다. 종종 외갓집 마당에서 삽으로 흙파기를 하다가 음식쓰레기 구덩이가 나오면 도망갔다.


우리는 남의 집에서 얻어 살았는데 그 집 마당에 감나무가 네 그루나 있었다. 늦여름부터 풋감이 떨어지기 시작해 가을이 되면 마당이 질펀했다. 부드럽게 휘어진 단풍나무도 있었고, 마당은 길가의 보도블록을 가져다 메웠는데 뒤집으면 지렁이가 많아서 열심히 잡아다 닭을 주었다. 우리 부모님도 우리 할머니도 지금 생각하면 정말 하기 어렵고 고된 일들을 해내셨다. 천방지방 돌면서 말썽을 피워쌓는 어린이더러 집안일을 도우라든지, 할머니를 거들라든지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내게 하나도 일을 시키고 책임을 지우지 않았다. 밑으로 동생과 사촌동생이 하루 차로 태어나면서 그 애들을 키우면서 천기저귀를 하루 2번 애벌빨래해 세탁기 돌려서 들고 건물의 옥상에 올라가 일일이 털어 널고 집게로 집는 일을 하면서 밥을 먹이고 저녁을 하셨으니까. 덕택에 나는 해맑은 꽃밭 머리로 자라 예쁘게 생긴 잡초를 퍼와서 마당에 심었더니 옥수수가 주렁주렁 자라는 통에 할머니가 (옥수수 묘목을 심은) 집주인에게 물어주었다고 했지만 나를 꾸중하진 않으셨다. 나는 어른들의 노동 밑에서 느긋하게 자랐고 공부도 안 하고 활개를 치며 어느 날은 큰 외숙모가 하는 목욕탕 카운터에서 천사소녀 네티를 보고, 외숙모가 물청소하는 옆에서 때밀이용 침대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하염없이 보았으며, 물탱크도 쪼르르 달려가 사다리를 오르고 공원관리인 한직을 하는 할아버지가 순찰 돌 때 오토바이 앞좌석에 타고 산성을 한 바퀴 돌고 논을 구경하고 텔레토비를 8시 40분까지 보다가 학교에 맨날 지각하고 10살부터는 관악부에 들어가 클라리넷을 했는데 부모님께 1개에 2만 원 하는 리드를 사달라고 하기 멋쩍어 늘 악기가 좋고(사비로 샀다) 리드가 남아돌지만 부활동에 드문드문 오는 애의 리드를 훔쳐 썼다. 어린애라도 이런 집안에서 자라나면 자기 앞가림을 자기가 해야 한다는 기이한 압력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자기 선에서 처리한다는 생각이 앞서지 무엇을 요청해야 하고 무엇이 도움받아야 하는 건지 가림 하고 부탁하는 데에 매우 미숙하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 가족들은 사소한 헬프는 전혀 입 밖으로 내지 않으며, 많은 갈등을 빚은 소통법이나 여전히 직접 필요한 바 요구를 해야 도움을 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대신해주는 걸 침해라고 여기며, 그렇기에 마치 먼 우주의 여러 별들처럼 멀찍이 떨어져야만 존재하는 특이한 가족이 되었다. 애인은 한 번 우리 아버지와 밥을 먹은 적이 있는데 모두 일제히 자기 삼계탕에 집중하고 간간이 말없이 소주잔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 문화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의 집에서는 모두 토론을 한다고. 나는 그 말을 듣고 우리는 옛날부터 책 읽으면서 밥 먹었어,라고 하니 그게 더 이상하단다. 아버지는 바둑을 보고 동생과 나와 언니 모두 제각기 다른 책을 밥상 밑에 놓고 넘겨가며 밥을 먹고 다 먹으면 방으로 들어가는 게 이상한가? 그리고 이것이 어떤 불만의 표현도 아닌 지극히 안정된 평화임에도.

 

때문에 우리 집에서는 비언어를 해석하는 소통법을 곁들여야 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눈빛도 손짓도 다 필요 없고 무조건 ‘마음의 눈’으로 바라봐야 한다. 언변에 이골이 난 집이기 때문에 말로 신뢰를 쌓는 것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오로지 어떤 결과, 어떤 실험을 몇 차 시도했는데 그 결과 값, 누적된 행동, 행동에서 비롯한 비언어들이 중시되었다. 말보다 태도를 믿고, 믿는 구석이 있으면 절대 철회하지 않는다. 다분히 굉장히 성향이 보수적이고 나 또한 진하게 물려받은 성질이다. 다만 나는 내가 갓 태어난 오리 새끼였을 적부터 졸졸 따라다닌 외할머니의 성격이 더욱 두드러진다. 왜냐하면 내게 있어 할머니가 내 주양육자였고 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한 번 언급했을 테지만 나는 아무 거리낌 없이 부모에게 정신병이 있는 것과 동성애자임을 (+폐쇄병동 입원 의사까지 트리플) 밝혔기 때문이다. 그리고 삽화의 혼란으로 야기된 것이겠지만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것을 이해할 것이라 생각했다. 어제의 내가 오늘의 환자복이 되어도 알맹이는 동일한 것처럼 생각했지만 부모님은 몹시 충격을 받았고 특이 아버지는 2년 내내 화를 견딜 수 없어했다. 나는 전혀 두 사람이 어떻게 느낄지를 조금도 고려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만약 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시지 않고 계셨다면, 그래서 내가 나의 가장 내밀한 두 정체성을 밝혀야 했다면 어떻게 말했을까? 애인이 생겼을 때 부모님보다 할머니에게 소개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얼마 전 예식이 있어 일가친척이 모두 자리에 모였는데 큰할머니네가 있는 금사리나 은산에서 오신 할머니의 친지들이 나더러 제 외할머니를 꼭 태겼다고 말했다. 지금도 성묘를 가면 할머니가 기른 우리 형제들 모두 앞다투어 떼를 다듬고 피를 뽑는다.

 

 

내가 처음 영화관에서 영화를 본 것은 5학년 때의 일이었다. 고향엔 ‘금성 극장’이 있었고 단관이었다. 맨 처음 본 것이 타이타닉인지 공동경비구역 JSA인지 모르겠다. 도서관을 이용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의 일이다. 도서관을 가려면 버스를 타야 했는데 버스를 타고 이동하거나 부모님이 태워다 줘야 했는데 우리 부모님의 성정은 매우 게을렀기 때문에 가끔만 갈 수 있었다. 집에는 한겨레 21, 민중교육 같은 주간지, 월간지가 있었는데 그런 것들도 그냥 읽었다. 설화와 민중 같은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니 초등학교 선생님들은?? 하는 반응을 보였다. 나는 옛날이야기에 푹 빠져 있었다. 가장 좋아하는 건 도깨비들이 나오는 얘기, 아기장수 우투리 같은 것으로, 당시의 나는 여성이 주인공인 서사에 조금도 감정 이입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여자 주인공이 등장하는 거의 모든 텍스트들은 읽은 적이 없다. 이를테면 소공녀 같은 것, 빨간 머리 앤이나 삐삐 롱스타킹 같은 외국 여자애들이 나오는 것은 전혀 손도 안 댔고, 디즈니 만화도 공주들이 나오는 건 살면서 본 적이 없고 피터팬만 주야장천 보았던 기억이 난다. 또 나는 쥐 가족의 이사 같은 동물이 나오는 동화책을 좋아했는데, 도서관 체계가 엉망이어서 아무도 찾아주지 못했다. 결국 한 번 보고 다시 찾을 수 없었다. 여하간 문화적 낙후지에서 성장해왔기 때문에 체계적인 독서습관, 영화감상 혹은 음악 감상에서 항상 탈락했다. 후에 나는 3권으로 완결이 나는 엉망인 싸구려 무협지와 혼불 전집을 함께 독서했고, (다행히) 해리포터와 반지의 제왕이 개봉되는 시기에 성장했기 때문에 영상물을 접하는 데에 조금이나마 익숙해질 수는 있었다. 만화를 많이 읽었지만 슬램덩크는 읽어보지 않았다. 고등학생쯤 되자 부모님은 참고서나 수험서 이외의 책을 사는 것을 싫어하는 기색을 보였고, 자연히 MP3의 영상물과 음악으로 넘어갔다. 물론 문화 습득의 정석대로 움직이지 않은 나는 퀴어 영화를 보고 메탈을 주로 들었다. 나의 취향은 남들이 보기에 서로 연결되는 구석이 조금도 없었지만 나는 그 두 사이 멀고 먼 점 A와 점 B사이를 경험적으로 거닐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자의적 연결과 해석은 후에 정신병이 발발 사방으로 분산되었을 때, 사라지고 깜빡거리는 자신의 자아들을 다시 어떤 구심점으로 끌고 오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정신병이 발발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과거사에서 얼마나 정신병적 순간이 존재했는지 규명하는 데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앞으로 일어날 정신병적 순간들을 얼마나 잘 대처하느냐에 있다. 정신질환은 아주 오래전에 태동했다 하더라도 어느 순간 훽 돌아 두드러질지 알 수 없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정신질환은 유동하는 정체성과 아주 궁합이 잘 맞으며, 당신이 자기 자신에 대해 혼란스러울수록 병증이 앞다투어 발현된다는 것이다.

 

10대 때 나는 한 명의 여자를 아주 사랑했고, 우리의 관계엔 두터운 신뢰가 존재했다. 친구네 집에 간 것이 처음이 아니지만 나는 10대를 마칠 때까지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였는데 그중의 한 번이 그 친구의 집이었다. 바짝 긴장한 나는 각을 잡고 소파에 앉아있었다. 집안에 맴돌고 있는, 익숙한, 언제나 그에게서 맡을 수 있던 냄새가 가득해서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당시의 나는 여자를 사랑하는 것에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고등학교 때 전 학년의 누군가가 강당의 부실에서 키스를 했단 것이 밝혀져 레즈년들이라고 낙인이 찍혔는데, 나는 진득한 집착을 나누어도 그와 별개의 인물이었다. 나는 매일 쉬는 시간을 그에게 내려갔고, 2학년에 되어서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는 일지를 적었으며, 11시에 자습이 끝나고 가버린 2학년 건물 교실에 몰래 들어가 그의 자리에 앉아 있곤 했다. 그리고 늘 전화를 걸었다. 그 3년 동안 학내의 공중전화기가 유지된 까닭은 내 덕이었다. 1시간여를 통화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으면 수십 개의 동전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데 꼭 나와 같았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는 것은 아주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지만 다들 입 밖으로 꺼내 비웃지 않았다. 외려 ‘리단이라면 그럴 법도 하지’하고 암묵적 예외 취급을 받았다.  나는 담임과 싸우고 책상을 던지는 괴팍한 놈이었고, 느슨한 소속부터 의리가 두터운 소속까지 편이 되어줄 친구가 많았다. 그렇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좋아하던 애들은 점점 레즈라는 이유가 불거지며 다른 친구들과도 멀어지고 따돌림의 대상이 되었다. 3학년쯤 되자 우리에게도 뒷말로 뭐라 하는 애들이 생겼나 보다. 3학년의 그는 내 반에 딱 2번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의 옆자리엔 언제나 내 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은 그의 친구들이 제일 마뜩지 않아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졸업식날, 나는 다른 애들과 같이 술을 먹었고, 늘 그의 절친한 친구 자리를 노리던 애가 자신은 아무리 해도 그 자리에 앉을 수 없다며 “네가 이겼다” 포기 선언을 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그의 사이드킥, 그의 윙맨. 당시 나는 한 번도 정체성에 대해 걱정해 본 적도 흔들려본 적도 없었다.

대신 다른 것을 고민했다. 예상만큼 수능을 잘 치지 못했던 그는 대학 진학 이후 연락을 끊었다. 내가 진학한 대학은 연산군이 놀던 궁터로 애들이 향락을 즐기다 미쳐버리기 일쑤라는 곳이었다. 나는 정말 진지하게 술, 담배, 섹스는 만 19세 이전에 끊어야 한다는 지론이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려면 옛 여자와 정절을 지키는(?) 것이 조금 우스워지는 일이었다. 물론 그 셋은 이미 달성하긴 했으나, 계속 실험해보고자 하는 마음이 가장 컸다.

어찌 되었든 약 2년 동안 운동권으로 살았고, 그 일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내게 주어진 과업을 알았다. 그것은 이십 대 초반을 살아가는 모든 소수자들의 문제인 정체성 문제였다. 지금이라면 레즈비언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이성연애를 하지 못하겠지만, 당시의 나는 큰 분열 없이 수행하고 있었다. ‘10대를 바친 여자‘ 문제를 해결해야 했지만 그의 연락이 두절되었다시피 했기 때문에 그 상태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나와 연애했던 남성과는 공통점이 있었다. 바디를 인식하는 데 조금 문제가 있었다. 특히 옷을 입고 다니는 일은 아주 골치가 아팠다. 우리의 육체성이 어떻게 공유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보다 나았다. 소속된 공간에서는 자주 섹스 이야기가 오갔는데, 대게 천역 덕스 레 한 천 번 하면 되지 않아? 하고 누군가 농담처럼 말했는데, 실제로 한 천 번쯤 하면 적어도 제 몸에서 무엇을 원하거나 욕망하는지 같은 것들이 따라오는 것 같았다. 아니 자연스럽고 익숙해지는 것이 있다. 그리고 저 두 가지는 나 혼자서 육체를 고민했을 때 결코 달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선득한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결국엔 이성연애관계가 끝나야 한다는 마침표가 눈에 보였다. 이하 조색기에 나오는 이야기로, 나는 유럽여행에 갔고 가서 여자와 놀았고 사방의 퀴어문화에 크게 안도감을 얻고 돌아와서 그렇게 살기로 다짐한다. 10대를 함께한 여자는 정리했고, 다음 학기에 등록해 처음 본 사람에게 반해 3일 만에 연애를 시작했다. 그리고 간과한 게 있었다. 이전까지 나는 타인의 욕망의 대상이라는 앉을자리가 펼쳐져 있는 사람이었는데 내가 타인을 욕망하니 어디에서 서있어야 할지 알지 못했다. 혼란이 펼쳐졌다.

사람이 너무 많은 정체성을 가지면, 결국 그것을 소유하려고 마음먹는 것 자체가 너무한 과업이라는 것을 그 모든 일이 지나서 알게 되었다. 하물며 그것을 모두 잘하려 작정하면 반드시 반작용이 일어난다. 반드시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는, 지키고 있는 선을 유지하면서 조금씩 늘려 나가야 하는 것이다. 물론 당연히, 단번의 사건으로 바뀌게 되는 드라마도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정답은 각기 다르지만, 내 결론은 “우리를 바꾸는 드라마가 존재한다. 그러나 모든 순간이 드라마는 아니다”라고 개인적인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그때는 모든 날들이 극적이었다. 당시 퀴퍼는 청계천의 어느 소광장에서 열렸는데, 그곳의 사진 전시회에 참여했다. 문화기술 지라는 수업에서 우리는 퀴어들의 자기 이미지 체득과 실현에 관한 조사를 했는데 우습지만 게이, 레즈, 바이 그리고 소수자에 대한 윤리적 이해를 추구하는 근대 모범시민인 친구가 함께 했다. 그때는 본 디스 웨이가 성당에서 흘러나올 법한 시기였고, 우리는 매번 쉬는 시간에 빌링 슬리관 앞에 모여서 담배를 피웠다. 마지막 보고서는 교수님께 유래 없는 칭찬을 들었다. 그분은 그야말로 제각기 다른 좌표의 인물들이 서로 이해를 하기 위해 어떤 윤리를 실천하게 되는지 관심이 있었고 우리에게 소고기도 사주었다.

 그 여름엔 지리산에 갔다. 2박 3일은 다른 친구들과 함께 했고 그다음 일주일은 친구 하나와 함께 정처 없이 떠돌았다. 우리는 버스를 타지 않고 둘레길을 따라 이동했기 때문에, 가게도 뭣도 없었다. 첫날 묵은 곳은 다음날 잡초를 뽑고 낫으로 베고 일을 돕고 나왔다. 우리는 수통도 없어서 시냇물을 먹기도 했다. 몇 시간 걷다가 나오는 집의 문을 두드리고 밥을 달라고 졸랐다. 어떤 할아버지는 “웬 도깨비들인 줄 알았네” 하면서 새 밥을 지어주셨고, 어느 아주머니는 밥을 줄 테니 고춧대를 세우는 일을 시켰다. 우리는 아무 일이나 다 했다. 그리고 길을 가다가 보이는 모든 산딸기와 열매를 다 따먹었고, 절에도 가서 밥을 청했다. 산속의 절이라 보살님도 없이 스님들이 밥을 하는 듯했다. 감자수제비를 먹었는데 감자가 너무 맛있었다. 그리고 삼일 짼가에는 너무 배가 고파서 프란체스코 수도원과 한센인 요양시설이 있는 곳에 가서 밥을 빌어 먹었다. 그때는 정말 배가 고파서 칼로 죽순을 잘라먹었다. 갑자기 비가 왔고, 비를 쫄딱 맞으며 가다가 어떤 낚시 아저씨들이 차를 세워 태워줬다. 그 아저씨는 혼자 귀농한 분이었고, 나머지 아저씨들과 잡어를 찌개로 끓여서 먹었다. 저녁때 아저씨와 그가 담근 갖가지 술을 맛봤는데  10년 된 국화주부터 시작해서 그 집의 보물인 왕벌주까지 먹었다. 왕벌주는 너무 먹으면 독이 오른다며 조금만 먹으라 했는데 마시자마자 몸에 그처럼 열이 팽팽 도는 술은 처음이었다. 우리가 다 취하자 세수를 하고 오라며 뒷문을 열어 계곡에 보내줬고, 돌아와서 2층에 올라가 잘 채비를 하는데 그 상황이 너무 웃겨 친구와 웃었다. “나랑 여행하기 잘했지” 다음 날은 보리수 열매를 잔뜩 따먹었고. 비를 많이 맞았다. 신이 다 젖은 상태로 우리는 어떤 우중충한 기 수련원 같은 곳에 흘러감 겨 갔다. 습기가 너무 많아 산길을 걷노라면 물속을 걷는 것 같았다. 물고기들처럼. 우리는 여자 샤워실을 찾아 들어가 샤워를 하고 그 바닥에서 자려했지만 불길한 기운이 들어 마을로 내려왔다. 아니나 다를까 그 밤은 유래 없이 천둥번개가 치고 폭우가 내렸다. 처음으로 사람 사는 노인정에서 보일러를 때며 잠들었다. 저녁은 신라면을 먹었고. 돈 주고 산 것 중 처음이었다. 가끔 우리는 산을 몇 시간이고 헤맸다. 산에는 왜 그리 동그란 무리를 진 날파리가 많은지. 앞에서 가면 그것들이 얼굴에 달라붙기 일쑤여서 번갈아가면서 신발끈을 매거나 두리번거리거나 회피하면서 길을 갔다. 또 어디에서는 너무 더워서 물소리를 따라 올라가 찾아낸 작은 폭포가 있는 동그란 못에서 수영을 했다. 사천면에서 우리가 여행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친구가 여정에 동참했다. 우리는 어느 절을 목표로 올라갔는데, 그곳은 망했고 그 아랫집에 내려가 밥을 달라고 청했다. 우리는 감자밭의 잡초를 뽑고 돌을 골랐다. 비건인 부부가 살았고 안주인이 우리를 보고 “짝꿍”에게 알려줘야겠네,라고 말했을 때부터 그분들이 사회단체에서 일했던 티가 났다. 햇감자가 맛있었고 상추로 초간단 샐러드를 하는 것을 배워, 지금도 자주 해 먹고 있다. 그곳에서 밖에 나가 수도를 틀고 샤워를 하는데 평생 그만큼 많고 빛나는 별들을 본 적 없었다. 마치 하늘이 하얀 것처럼 별들의 색깔도 보일 정도로. 그리고 대화 시간을 가질 때 나는 커밍아웃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왼갖데에 말하지 않고 못 배기며 살았나, 싶어도 아주 훗날 여행을 함께했던 친구가 자신은 네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고 어떤 감동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해줬다. 그러면 무엇하리. 나는 길에서 연인에게 편지를 쓰고 우체국 아저씨가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갈 때 두 손을 흔들어 붙잡아 그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것이 그의 집에서 그의 엄마가 몰래 읽어보고 문제가 생겼다고 한다. ‘편지 내용이 친구에게 받을 성질의 것이 아니고 남자에게 받을 것 같은 내용이다’고 질타하면서 동성연애를 알아내고 애인을 감금시켰다.

주간리단 1호에서 나의 초반과 삽화 발발 과정에 대해 상세히 서술한 바 있다. 사실 지금 와 생각해도 그때와 같은 휘말림을 다시 겪지 않으리란 자신이 없다. 그리고 그때는 인생에 빨간 줄이라도 그인 것처럼, 학사정보에 뜬 주요 우울증 애로 병결 휴학을 한 것이 인생의 큰 누를 저지른 것 마냥 느껴졌으나, 그것이 삶에 얼마나 영향을 끼치는 것일까? 나는 삶에 일어난 기회를 제대로 잡지 못했고, 혼란만 가중시켰으며 혼란을 일종의 실패라고 생각했다. 내가 통제해내지 못한 단점들, 과오들, 실수들이 마치 나를 향한 칼날처럼 느껴지곤 했고, 때문에 매일매일 많은 술을 마셨다. 그러면 무뎌지곤 했고 그러면 끝까지 가더라도 잘못이 덜어진 느낌이었다. 언제는 사학과 친구들과 술을 이빠이로 먹고 학생회관의 소방호스를 보관하는 벽면 문을 열어젖히면서 “나는! 저곳으로 갈 거야!” 외쳤으며, 친구를 불러 술을 사게 한 후 뱀처럼 스르륵 빠져나가는 일은 예사였다. 그리고 정말로 나는 병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병이 보여주는 세계들을 사랑해마지않았다. 내 정신병은 당시 관련한 선생님, 과목, 수업과 발표 모든 데에 산재하고 있었고, 애인은 문화적으로 낙후된 내게 말과 시와 연극, 새로운 음악을 가르쳐주었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었고 나는 떠나고 싶었다.

첫 여자 애인과 나는 우수에 헤어졌다. 3년이 다 되어 가는 시점이었다. 그리고 나는 목공을 시작했다. 거대한 타카, 절단기, 테이블 쏘, 전동공구와 샌딩기 그리고 다른 수치를 가진 세상에 스펀지처럼 흡수되어 삼 개월이 되자 일꾼 노릇을 했으며 반년이 지나고 수업을 열었다. 그리고 그 무렵에 단약을 했다. 매일 8시간씩 일하고 고되게 일하며 중간중간 커피를 마시고 휴식을 갖고 간식을 먹고 “목수는 5시 넘으면 일 안 해!”라는 판타스틱한 일터에서 내내 시간을 보냈다. 나는 다루끼 한 단은 족히 메고 이동할 수 있었고, 18T 합판도 마찬가지였다. 그곳에서 많은 가구를 만들고 매주 수업을 진행했다. 목공을 가르쳐준 디자이너 아저씨 말고, 진짜 목수일을 하고 있는 아저씨가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이곳에서 병에 저항할 수 있는 것들을 많이 배웠는데 몇 가지 꼽자면 ‘호의를 베풀기’ ‘한 번에 완벽하게 하기보다 수정을 거쳐서 완성에 도달하기’ ‘다른 이들의 작업이 얼마나 진척되고 있는지 살피면서 하기’ ‘청소는 모두 다 같이’ ‘대화는 가끔’ ‘노동 교환’

무릉도원까지 열망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있던 공방은 결국 노동력의 가격을 제대로 매기지 못하고 망했다. 그리고 앞에 있던 도자공방도 마찬가지 이유로 함께 망했다. 학생 때 각자 부모 돈을 정맥에 꽂고 실험하는 공동체와 실제로 생업으로 돈을 유지하며 공동체를 운영하는 것은 아주 다르기 때문이다. 현재 유행하는 ‘느슨한 공동체’ 일 수록 금전과 노동 분배는 더욱 필수적으로, 장기적인 공동체를 꾸리고자 할수록 역설적으로 서로 간에 거리가 필수적이며 세속적인 셈 법 또한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정신질환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돌봄 노동과 금전 지불 등에 대해서 다소 부정적인 시선을 견지한다. 정신병이 극심할 때 사람들은 다른 이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보다 분석하려 하며, 정신병의 중력이 어느 무엇보다 강력할 때 주위 사람들의 도움은 어지간해서는 그를 새로운 마른땅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때때로 병자는 타인의 도움을 끌어안고 다시 진창에 빠져버릴 수도 있다. 자신을 구해줄 새로운 인물을 바라는 것은 병적인 특징이면서 영원히 희구할 뿐인 소망이다. 정신병이 있는 이들에게 필요한 관계는 오히려 단발적인 호의와 상관없이 장기 지속되는 모종의 일관성을 가진 관계들이다. 이 사이에서 서로는 서로의 모든 것을 일거수일투족 알아야 할 필요성도 없다. 오직 그러니까 자신에게 어떤 변화가 생겼을 때, 변화를 직면했을 때, 변했을 때 그러한 달라짐을 보고하고 이런 일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이면 족하다. 그리고 이런 관계들이 많아질수록, 또 그 사람들이 나와 1:1 로만 관계 맺는 것이 아니라 서로 누군지 정도는 안다면 당신에게 최소한 프라이빗한 사회적 안전망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정신병이 있는 사람들은 서양화 읽는 법을 배우듯이 자신의 소실점, 등장하는 캐릭터들을 조합하는 과정을 익혀나간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흔히 우리의 과거에 매몰되게 되는데, 반드시 지양해야 하는 일은 아니다. 우리는 과거의 슬라임에 형상을 부여하고 어떤 종류의 것들은 제련하여 강도를 높인다. 과거를 조형하는 작업은 사실 끝이 없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재미도 있으며, 언젠가는 자신의 과거를 정렬하는 것이 자신의 과업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정신병적 능력은 비단 과거의 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정신병이 있는 이들은 대부분 자신과 자신이 분리되는 경험을 해본 바 있을 것이다. 분열이나 해리 같은 것들은 반드시 병적 증상까지는 아니어도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좋은 재료가 된다. 때때로 당신의 망상이나 사고장애, 강박증적 태도나 편집증적 태도도 써먹을 곳이 있다. 우리가 다르게 느끼고 다른 곳을 바라볼 줄 아는 것을 꼭 사회에 이로운 방법으로 표출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자신에게 이득이 될 방식으로 시도할 수도 있다.

내 인생에서 제일 난관이었던 부분은 여자가 되는 것이었다.  어렸을 때 나는 레즈비언이란 말을 입에 올리지도 못했다. 그곳엔 내가 알지 못하는 수치감이 있었다. 단순히 치마를 입고 화장을 하고 여성적 자아를 연출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그것을 하고 싶지 않은 내가 존재했고, 그의 영향력이 더 컸다. 나는 ‘스텔라’라는 인물을 만들게 된다. 나는 자신의 여성 부분에 영원히 눈을 감은 채로 살고 싶지 않았고, 몸을 가지고 실험을 하지는 못할 망정 그것이 무슨 금기라도 된 마냥 쉬쉬하고 싶지도 않았다. 다행인 것은 내가 옷에 대한 레퍼토리가 떨어질 무렵(운동복과 삼선을 신는 3학년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유니클로가 한국에 상륙했고 사람의 감시 없이 여러 옷들을 들고 혼자서 살펴볼 수 있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그전까지는 어떤 옷을 사고 입어야 하는지 감을 잡지 못했다. 나는 심지어 어느 시기엔 개량한복 따위를 주야장천 입고 다녔다. 그렇다. 이것은 단순히 자신의 성 정체성, 섹슈얼리티, 젠더 그런 도서관 300번대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이었다. 내가 자신의 몸을 부정한다는 사실.

그러나 부정엔 이유가 분명했다. 나는 여성적 면모가 거의 없고, 어릴 때부터 그렇게 성장했으며 나의 인생에 중요한 사건들은 모두 몸과 별개로 일어나거나 몸이 결합되었을 경우 위축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사 오기 전 해에 몇 달 다녔던 태권도장에서 입었던 도복은 내게 무한한 자유를 안겨주었고, 이사 와서 처음 새 학교에 갈 때 억지로 할아버지가 입혀준 롱 패딩은 지독한 수치감을 안겨주었다. 꼭 끼는 청바지를 입을 때면 다리를 자르고 싶었다. 대신 신체의 기능적인 측면이 부각되는 활동에서는 펄펄 날아다녔다. 이를테면 대학시절 농활에 가서 모두들 똑같은 티셔츠와 몸빼를 입고 고무신을 신고 방울토마토를 따거나 수박 덩굴을 갈퀴질 하거나 비 맞은 수박을 강에다 버리는 일을 할 때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심지어 신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런 분열을 통일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래서 나는 스텔라를 위해 원피스를 샀다. 샌들도 샀다. 화장품도 샀다. 새로운 헤어컷도 했다. 새로운 외양의 인물이 되는 것은 돈이 좀 드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시도는 아주 흥미로운 균열을 일으켰다. 스텔라는 리단과 유사한 성격이지만 가장 다른 점은 그는 여성에게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다는 점이 달랐다. 스텔라를 만나면서 삶이 급격하게 바뀌었다. 그는 리단처럼 자신만만하고 의기양양하지만 완벽히 여성적이기 때문에 덜 위협적이었다. 기실 ‘여성적’이라는 수사는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여성적이라기보다는 뭐랄까 feminine 하다는 편이 본모습에 가깝다. 사실 뭐가 옳겠는가, 생물학적으로 여성인 리단과 여성적 자아를 연기하는 스텔라라는 두 자아의 각축은 비단 나만의 재미가 아니었다. 보이는 몸과 보여주는 몸 여하간 그것을 수행하는 스텔라와의 관계는 당시 나랑 만나는 모두를 즐겁게 했다. 그리고 그들도 스텔라라고 불렀다. 이를테면 “오늘 스텔라 샌들이 예쁜데?” 사람들은 내가 스텔라의 옷을 입는다는 것을 재미있어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내심 내가 흥미로워하는 부분은 스텔라가 리단의 옷을 입는다는 데에 있었지만 이 미묘한 차이를 알아차리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어느 완벽한 날. 헤어도, 안경도, 화장도, 디올의 립스틱도 가방도 속옷도, 아, 악취미 일진 몰라도 스텔라의 원피스 아래에는 항상 남자 속옷을 입었다. 아무튼 그 완벽한 날은 신촌에서 퀴어퍼레이드가 있었고 그날 나는 내가 스텔라로써 달성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냈다고 느꼈다. 여자 친구, 레즈 동료, 맥주와 담배, 춤을 추었고 나중에 찍혔던 사진을 보았더니 팔 근육이 도드라져 있었다. 그 뒤로 스텔라가 오지 않더라도 다양한 옷을 실험할 수 있게 되었다. 창조해낸 가장 여성적 자아는 이후 가장 남성적인 의상을 추구하는 길로 이어진다.

여전히 정신병은 내게 새로운 고통이나 경험했던 고통을 안겨주기도 한다. 지금 나의 기이한 증상의 기원이 과거에 있음을 알려주기도 하고, 미래에 일어날 일을 배태한 형상임을 말해줄 때도 있다. 나는 병의 서사를 걷는다. 솔직히 말하면 병을 원망한 날들보다 사랑했던 날들이 많았고, 그보다 더 지난 후에는 병을 이용해 먹고 팔아먹어 볼 생각도 했다. 특히 조증일 때에는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충동적 행위를 하기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병을 표출하는 법을 많이 실험해보았다.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도벽이 있었다. 한 자릿수가 되기 전에 물건을 훔쳤고, 심지어 헌금함에서 돈을 훔친 적도 있었다. 중학교 시절 빼빼로를 훔치다 걸려서 창고에 감금당하고 얻어맞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 후에 그 가게에 억하심정이 들어 참기름이나 설탕을 훔쳤다. 그리고 이런 기질이 나이가 들어도, 들어도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병증과 결합해 이것이야말로 너 자신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가끔 자신을 해하고 있을 때의 나야말로 제일 안전한 상태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안전한 상태를 지속하기 위해 굳이 자기가 자기를 해치면서 살 이유는 없다고 믿는다. 내 의식은 결국 하나의 수채 구멍으로 흐른다.

꿈에서 누군가 ‘나는 너의 시체다’라고 말했다. 내가 말한 걸 수도 있다. 재미있게도 ‘너는 나의 시체다’가 아니라 그 반대였다. 나는 잘 알고 있다. 나는 모(한자)의 시체다. 나는 너의 잔류. 우리는 간간이 연락을 주고받는데, 며칠 뒤에 보기로 했다. 그가 무엇을 들고 올지 나는 모른다. 늘. 언제나 다분히 늦은 답장에 쾌히를 위장한 응답을 보냈다. 그의 덕택에 나는 사람의 죽음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자살은 타살인가?”라는 질문은 족히 10여 년 전쯤에는 대 사회적으로 성립했던 질문이었다. 현재는 아무도 자살은 타살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실행을 내리는, 판단을 내리는 입장에 무게가 실려 있기 때문에 이제는 사람들은 그의 죽음의 원인에 대해 분석한다. 반면 우리들은 그러니까 정신병에 노출되어 있는 우리들은 이제 “자살은 병사인가?”하는 물음과 싸운다. 간혹 되바라진 질문을 즐겨하는 이들이 “자살은 자연사인가?”하고 묻는다. 죽음은 단순히 육체의 마감을 뜻하지는 않는다. 많은 병자들이 어떤 상태를 죽음과 비견할 만한 상태를 알고 있고, 언제나 싸우고 있다. 그리고 때로는 지기도 하는데 지는 것이 반드시 죽음의 성사는 아니다. 외려 미적지근하고 진득한 죽음이 우리를 장악하기도 하는데, 그때는 차라리 아무 일이나 일어나 이 상태에서 벗어나기를 염원하기도 한다. 바로 그 권태로운 상태를 우리는 죽음보다 두려워한다. 죽음은 지나치고 과도한 변화, 그래서 사람이 완전히 재편되는 상황을 일컬을 때도 쓰인다. 정신병에 걸린 사람들은 자신의 면면이 병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다른 색으로 일렁거리는 경험을 한다. 그렇게 알게 되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데 이 비가역성 또한 죽음과 다분히 비슷한 측면이 있다. 그렇다. 그래서 당신이 죽었을 때 내가 남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도 당신을 보며 손을 모아 기도했다. 너를 돌려놓기 위해서. 무엇에서? 우리는 힐금힐금 서로의 구김 진 검은 정장을 살펴보았다. 아, 겉옷만 벗으면 단추가 자개로 된 것을 알 수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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