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후에 가장 많이 들어본 질문은 “어떻게 그런 글을 쓸 수 있느냐”에 관련한 것이다. 어찌 해야 중증의 정신병자가 자조 모임도 꾸리고 글도 쓰고 만화도 그릴 수 있는지 아주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셨다. 보통 이런 수순이면 정신병이 있어도 고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정도의 병이었기 때문에~ 라고, 또는 아직 인지기능 상태가 그리 나쁘지 않기 때문에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책에 쓰여있는 내가 하루에 복용하는 용량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이 사람은 경증의 질환자이기 때문이란 추측은 하나도 없다. 이것은 사실 주간리단에 ‘’정신병과 창의성’’에 관해 써야 했을 때 가장 근본의 문제였는데, 결국 그 글은 중구난방으로 쓰여졌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의 사례를 찾을 수 없어서 미진한 수준으로 그쳤고 본책에서는 짤리고 말았다. 내가 정신병을 대하는 많은 부분은 퀴어성에서 말하는 바에서 차용해왔던 것처럼, 병적인 순간과 예술성이 발휘되는 순간들 사이에 많은 교집합들이 있다고 여겼지만 아쉽게도 그 생각들은 많은 조증적 판단이 그렇듯 중간과정을 남기지 않고 휘발해버려서 결국엔 설득력 없는 소리가 되었다. 그래서 미뤄두었다. 언젠가 정리가 되면 쓸 수 있겠지. 지금은 얼버무리듯이 우울증일 때에는 쓰고자 하는 바를 축적해두고, 조증의 힘을 빌려 실행한다는 소리는 사실 듣고 있어도 뭐라는겨? 라고 충분히 생각할 만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위의 말이 가당찮은 것이 나는 우울증 때에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고, 조증일 때에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책을 출간되고 가장 반응이 바뀐 것은 가족들이었다. 물론 나는 책에 가족의 이해를 받고, 구하고, 뭐 이런 내용이 일절 없으며 가족이라는 존재가 지지기반이 될 수 있는 일에 대해 가족마다 다르고, 그런 대우를 받기 어려울 수도 있다. 뭐 대충 이런 식으로 써놨기 때문에 그들이 읽지 않길 바랐다. 하지만 출판사에서 집으로 책을 보냈고 택배를 받은 가족들이 이것을 열어봐라 하는 식으로 대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앞에서 개봉해야했다. 가족들은 내가 이 책으로 인해 사회적인 동정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많이 한 것 같다. 증쇄를 하게 되었을 때는 동생에게만 말했다. 태도가 변한 것은 3쇄를 찍으면서 포털 사이트에 검색이 되는 것을 보고나서였는데 무슨 내용이길래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는지 너무 궁금해해서 읽도록 두었다. 그리고 가족의 반응이 드라마틱하게 변했다. 나는 길바닥의 흔한 뻐꾸기새끼에서 천연기념물로 격상했고 해외 출간 제의 사실이 잇달을 때 마다 기념물 3호에서 2호 1호로 바뀌었다. 책에는 퀴어나 레즈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마치 나는 레즈비언이고 정신병자야 라는 말에서 앞의 말은 생략되고 후자에만 집중되듯이 병자이면서 병을 인정하고 이해하고 공부하고 사회적 존재가 되는 것을 포기 하지 않는 그런 얘기에 확 꽂혔는지…. 아무튼 잘 모르겠다. 얼마 전에는 언제부터 병의 전조를 보였는가? 에 대한 말이 나와서 나는 10살 때부터 하느님과 직통으로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라고 하니 어머니가 굉장히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우리 부모는 나를 직접 양육하지 않고 외할머니께서 나를 거의 돌봤기 때문에 어렸을 때 내가 보인 언행에 대해 어머니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외할머니는 각종 가사와 여러 동생들을 돌보며 언제나 청소와 부엌 살림, 빨래를 하루에 두 번이나 하며 2층 계단을 동생은 업고 나는 어르며 오갔고, 열심히 성당에 다니셨지만 그때마다 두 살 먹은 나를 데리고 다니며 자동차 번호판 숫자를 읽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나는 숫자를 그렇게 배웠다. 부모님이나 어른이 동화책을 읽어준 기억도 없다. 시골 동네여서 아이를 위해 책을 사주거나 도서관에 데리고 가기가 어려웠다. 한글을 가르친 적이 있었겠지만 내가 글을 읽을 줄 안다는 사실을 어른들이 바로 안 것은 아니다. 계속 책을 들여보고 있어서 그림을 보고 있겠거니 했던 것인데 내용을 알고 읽고 있었다는 사실이 훗날 밝혀지면서 그들을 놀라게 했다. 내가 어머니와 책을 같이 보았던 유일한 순간은 여섯 살 때에 책에 강아지가 자기 몫의 밥을 먹었어요, 라는 문장에서 ‘몫’ 이라는 글자를 어떻게 읽냐고 물어봤던 때였다. 난 언제나 할머니가 나를 소중히 대해 주셨기 때문에 부모님에게 사랑받고 싶다라는 생각도 기분도 느낀 적이 없었다. 관심을 받으려 공부를 잘 해야겠다고 느낀 적도 없었다. 그래서 개떼처럼 무리지어 떠돌고 사고를 치고 돌아다니며 집에 오는 어린이였다. 시계가 드문 시절이었기에 할머니는 분꽃이 피면 집에 돌아오라고 했다. 아무 곳에서나 잘 자랐던 분꽃은 5시 반 정도에 꽃을 피우는데 그때에 맞춰 집으로 돌아갔다. 할머니는 내가 달력 뒷장을 전부 낙서해도 그림을 잘그린다고 칭찬해주셨고, 내가 고무찰흙으로 강아지를 만드는 것에 집착하고 수십마리를 만들 때에도 잘한다고 하셨다. 2학년이 되던 해에 아이큐 검사를 한 적이 있다. 정확한 수치를 기억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학년에서 내가 제일 높게 나왔었노라고 스물이 넘어서 그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바빴고 내게 다른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한 적 없었다. 덕분에 나는 숙제도 대충하고 매일 일기를 쓰지 않아 나머지 벌로 30줄의 일기를 써야 했고 감히 말하건데 그것이 나의 글쓰기의 시초가 아닌가 한다. 우리 형제는 보습학원에 다니거나 학습지를 하지 않았다. 전교조 출신의 아버지가 그렇게 시키고 싶지 않아서 였다. 언니는 학원에 보내 달라고 조른 적이 있다고 하는데 나는 매일 노느라 바빴다. 초등학교에서 나는 사회성 공부를 하는 대신 남자애들과 놀며 아지트를 만들고 전쟁 놀이를 하고 모험을 했다. 동성의 친구가 생긴 것이 4학년 때가 처음이었으니. 그리고 그렇게 생긴 친구와 남의 집 지붕을 올라가 사람 관찰하기 놀이. 남읮집 담벼락을 넘고 마당을 조심히 가로질러 지붕을 타고 내려오는 놀이 같은 것을 했으니…. 하느님 아버지와 대화를 나눈 기억은 4학년, 5학년 때까지 있었지만 전학을 가고 지금의 고장으로 터전을 옮기며 모든 것이 바뀌었다. 나는 알파벳 쓰기도 못하는데 새로운 학교에서는 영어 과목을 진지하게 가르쳤다. 나는 따돌림을 당했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무엇이 이상행동이고 무엇이 정상적인 행동인지 판단하는 것이 아주 자의적이었기 때문에 이런 일은 힘들거나 심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대신 영어 학원을 다녔다. 2학년짜리 애들과 같이 영어 알파벳 읽는 것부터 다시 배웠다. 그리고 아무도 내 변화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부모님이, 특히 아버지가 내 재능에 관심을 보이게 된 것은 아주 훗날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 였다.
중학 1년 때 의례적으로 하는 아이큐 검사가 있었다. 나는 144가 나왔는데 집에는 알리지 않았었다. 반에서 150이 나온 애가 있었기 때문에. 대신 나는 사람을 만나는 재미를 배우게 되었다. 친구가 되는 것,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성적보다 내게 큰 영향을 미쳤다. 6학년 때 괴롭힘을 받으며 그 스트레스를 도서관의 책을 모조리 읽는 것으로 해소해왔기 때문에 여전히 책을 즐겨 보았는데 “책을 보니 성적이 떨어진다”며 빌려온 도서관 책을 아버지가 찢어버린 적도 있었다. 아버지와 대화하기 위해 자주 술을 마셨다. 얘기를 하자, 고 말하고 술을 들고 오면 자연히 자리가 마련되었다. 물론 내 얘기가 주로 비웃음 당하고 현실성이 부족하며…. 당연히 그랬겠지. 환각이 다시 생긴 것은 중학 2년 때의 일이었지만, 나는 사랑하는 친구,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무서울 게 없었다. 그러나 그때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할머니가 돌아가시며 나에게 가족이 없어졌다.
내가 레즈비어니즘과 정신병 정체성을 서로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서 부터다. 나는 대학에서 상담을 받아보기까지 내가 가진 환청이나 감각이 이상하다 여긴 적이 없었고, 알려야겠다는 일도 없었다. 대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와 나를 구분 할 수 없는 글. 그러나 그 사고과정을 남기기 위해 기록하는 일. 매일 노트에 적고, 집에 돌아가면 블로그에 또 적었다. 그때부터 글솜씨가 향상되었느냐고? 아니다. 이 시절에서 중요한 건 내가 매일 썼다가 아니라, 매일 쓸 만한 일들이 벌어졌던 내게 아무도 ‘네가 이상하다.’ ‘너네 조금 그렇다.’ 같은 말이 하나도 없었다는 점이다. 나는 고교 시절에도 중학때 사랑했던 이와 함께 학교를 다녔고 매 쉬는 시간에 갔으며 나의 무리만이 아닌 그 무리에 언제나 불청객처럼 찾아왔지만 그런 나를 두고 누구도 손가락질 하지 못했다. 내가 그만큼 개또라이여서 였을까…. 친구들이나 주변 반응은 ‘리단이니 그럴 수도 있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다. 누구는 레즈라는 소문이 돌기도 하고 누가누가 강당에서 키스를 했으며, 어쩌고 저쩌고 하는 뒷말들이 아예 없는 곳은 아니었는데 나는 운이 좋게도 (자기 친구들에게 좋아하는 사람 얘기를 맨날 했어도) 3년을 뒷담없이 보낼 수 있었던 사람들의 포용이 있었기 때문에 그 시간을 자기 부정에 쏟기보다는 기록을 남기는 데에 집중할 수 있었다. 나는 그를 관찰하는 데 아주 많은 시간을 보냈고, 그의 일거수일투족 버릇 습관 같은 것들을 찾아내는 걸 좋아했다. 매일 밤 자습실 창가에 책을 펴두고 창문 너머로 보이는 맞은편 건물의 그의 실루엣을 보며 공부했다. 환각과 자주 토론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주제는 그가 오늘 화가나 있었던 일의 원인 찾기에서부터 앞으로 뭘 할지 같은 미래에 대한 계획도 있었다. 고고학과에 가고 싶다고 했다가 아버지에게 대차게 까였기 때문에 그러면 철학과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ㅋㅋ). 아버지는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우리 학교로 옮겼는데(3학년 수험생이었던 언니를 챙기기 위해) 여전히 내게 관심이 없었고, 대신 내가 저지르는 비행이나 나쁜 성적 같은 것들을 담임이든 선생들이든 모조리 아버지한테 잔소리하고 나에겐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점은 아주 편했다. 나는 아버지와 나의 기묘한 관계의 문제점을 많이 알지만 2학년과 3학년에 걸쳐 내게 쏟아졌을 선생들의 불만을 아버지가 듣고 내게는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는 점에는 고마움을 느낀다. 특히 3학년 담임과 싸우고 내가 교실에 돌아와 책상을 던지고 기물을 부수고 그랬는데 거기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선생과의 싸움을 목격한 3학년의 반 친구들이 나를 옹호하면서 나는 편하게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그 해는 운수가 트였는지 별 생각없었던 독후감 대회 같은 것에서 장관상을 타고 한 달도 못되서 다른 대회에서 교육감상 같은 것을 잇달아 계속 탔던 통에 아버지는 내게 숨겨져 있던 재능을 자기가 발굴해냈다는 듯이 으스댔고 나는 그것이(글을 잘 썼다는 것) 전부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매일 수 장의 노트를 빠짐없이 쓰고, 그것도 모자라 블로그에 또 쓰고를 거듭하던 생활이 모여서 만든 결과였겠지만, 내 블로그를 칭찬하거나 나의 기록열을 언급하는 이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이 내 재능이라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그리고 내 글쓰기는 논술을 배우는 것과 억만광년정도 차이가 있었다. 우리는 논술이 시작된 첫 세대여서 학교측에서 강사를 초빙해 가르치게 했는데 그때 내 글은 총체적으로 엉망이었다. 이것은 대학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여러 학회를 하며 쓴 쪽글은 빈약하기 짝이 없었고 교양 수업에 제출하는 것들 또한 매한가지였다. 운동을 하면 (대자보를 많이 쓰게 되므로)글을 잘 쓰게 된다며! 다 구라였다. 내가 글쓰기에 대해 이것이 보일 가치가 있을 수도 있다, 고 생각하게 된 것은 대학 3학년 때의 일로 당시 애인이 다른 친구에게 ‘리단은 인풋이 그렇게 구린데 아웃풋은 왜 괜찮지?’ 라고 했던 말과, 내 블로그를 자기 이름을 서치하다가 우연히 알게된 선생님이 “너는 어떻게 그렇게 글을 쓰냐?”고 말했기에 깨닫게 되었다. 그 반응이 없었더라면 내 글쓰기는 언젠가 동력을 잃고 서서히 멈춰버려선 사장될 것이었다. 나는 운이 좋았다. 그리고 그 두 말을 들었던 해에 공황과 수면장애, 우울증이 겹치며 자살시도 하고 폐쇄병동에 입원했지만 그렇다고 기록을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
졸업 후 몇 개의 시쓰기 강좌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선생이 “당신은 방언으로 말하는군요” 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다시 수업에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그만 두었다.
마테오 리치의 기억의 궁전처럼 내게는 글이 되지는 못했지만 대기중인 문장들이 머무는 곳이 있다. 내 글쓰기의 핵심은 첫 문장을 쓰는 것에 있다. 첫 문장이 근사하게 나오면 그 뒤로 문장들이 연달아 줄을 서는 것. 만화도 마찬가지다. 어떤 한 장면을 위해 달려가는 것. 그렇다. 기억력과 기억술은 다르다. 기억력에 결함이 생겼을 때, 더는 이전처럼 기능하지 않을 때 절망하기 쉽지만, 기억술은 우리가 습득하고 훈련할 수 있는 영역이기 때문에 반드시 병의 악화와 함께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 병중에 써야할 일이 있어도 기억술과 기록들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는다. 설사 남이 봐주지 않는, 알아주지 않는 기록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계속되었을 때 언젠간 도움이 될 수 있다. 대학에 들어오고. 즐거운 수업이었던 어느날 선생이 “대학 교수들이라고 해도 다 머리가 좋은 것은 아니다. 늙으면 다 아이큐 100정도로 되고 막 그래” 얘기한 적 있다. 그리고 강조한 것이 특히 친구들이 글쓰고 이런 저런 일을 하면 꼭 말을 얹어주고 비평도 써주고 자리도 만들어주고 그렇게 동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사람으로써의 일을 해야 한다. 라고 했다. 내가 가장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나나 내가 만든 것들을 받아들여주는 환경에서 있었던 점이다. 이것이 나의 원동력이다. 이것이 내가 배운 바이고, 앞으로도 실천해야 할 영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