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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단 Oct 09. 2021


내가 아는 이는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달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제가 역사학도가 아니라 사학도인 이유도 아시리라 짐작합니다. 우리는 지나간 시간을 논하기 대신에 기록을 다루기로했기 때문입니다. 정제된 언어로만 말하기로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아무래도 歷은 어느 시절에 마침표를 찍고 그 이전 겪은 시간에 대해 분명히 한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지만, 제가 생각하는 史는 행위에 대한 기록이며 흔적이고 거기에서 그 목적이 무엇인지/무엇이었는지, 어떻게 해석할/될 수 있는지, 누구를 향한 것인지, 달라진 시간대와 사회상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등 다양하게 파생되는 물음을 주는데 개인적으로는 후자를 조금 더 편애하는 쪽인 듯 합니다. 사실 개념은 아무래도 상관 없습니다.



당신은 언제 그때라고 불렀던 시간이 시절이 됩니까? 아니 계속이라는 것에 마지막 장을 예감합니까? 아니면 누구나 다 그러하듯이 1년의 단위로 30일의 월로 1주 7일로 산술합니까? 혹시 당신도 분기나 분기점이라는 말을 씁니까? 지금 방금은 지나갔으니 전부 과거라고 불리는 지난 날이라고 불리는 공간으로 그것들을 전송합니까? 아니면 달력이니 책력이니 하는 것으로 흐름에 좌표를 찍습니까?



내가 시작과 끝을 누구에게 배웠을까요. 시절의 개시와 마감은 어떻게 파악할까요. 하늘이 높고 푸르러지고, 나뭇잎이 낙엽지면 가을이며 서리가 앉으며 겨울이 온다고 계절에서 배웠을까요? 어째서 사계의 변화는 마땅하고 사람의 변화는 불명한 것인가요. 당신도 종교 의례를 아시죠. 사순절, 부활절, 성탄절…. 한 해동안 정해진 주간에 정해진 의식을 치르지만 이를 드리는 사람의 마음이 해마다 같은 경건함은 아니죠. 달력을 넘기지만 그것은 30일이나 31일이 지났기 때문인 것이지 더 머물고 싶은 달이 있고 처절한 달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달력엔 끝이 있죠. 올해도 머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2022년이 된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을 테지요. 끝이 즉 시작인 우리의 달력은 시간을 수학적으로 합의한 오랜 결과물일 뿐이며 보통은 자신의 시작조차 어디인지 모르고 결말을 보고서야 그것이 끝임을 정의하니까요.



언젠가 나는 고비에서 달력을 선물 받은 적이 있습니다. 복잡한 이야기 입니다. 처음엔 시간을 선물받은 느낌이었고, 시간이 지나며 이 달을 넘기기 위해 버텼으며,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려 하기도 하고 잡다한 계획도 세워보았습니다만 더 시간이 흐르자 실용성을 잃고 상징성만 남았습니다. 결론적으로 달력이라는 물건 자체를 잘 사용하지 못합니다. 걸어두면 보기 좋은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지금 가진 달력도 4월인가에 멈춰있는 것 보면 영 쓰는 재주가 없는 것 같습니다.



내가 너무 자기의 속도에 천착해있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나는 당신이 바라는 모습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했고, 크게 슬퍼하고 실망했으리라 느낍니다. 여기가 달도 아닌데, 우리가 땄던 꽃은 시들고, 우리가 남긴 발자국에 눈이 쌓여 덮이는 게 당연하겠죠. 나만 멈추어있는 기분이 듭니다. 동일성과 연속성에 집착한 나머지 곡해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매우 미안합니다. 그리고 제가 느낀 상심의 이유를 정리하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잘 설명할 자신도 없을 뿐더러 ‘저놈은 원래 저런 놈이었지’로 비칠까봐 염려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은 일부분 사실이니까요. 그리고 이 ‘기간’은 앞으로도 숱한 문제로 작용하겠죠.



나도 당신에게 그 달력처럼 시간을 선물하고 싶었는데, 곰곰히 떠올려보니 당신에게 ‘필요한’ 건 선물이 아님을 잘 알겠습니다. 근본적으로는 변하지 않는 인간이면서 불확실성 앞에서는 갈대처럼 굴었던 때를 미안하게 여깁니다. 계획은 확실해지고서야 고지하듯 말하고, 대개의 시작도 급작스럽게 출발하면서 ‘본인의 본성’만을 강조하는 자신이 우습다고 느껴집니다. 마음이 좁은 사람이라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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