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소설입니다. 매일 타는 2호선에 관하여
소리는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 안은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여전히 사람들로 붐볐다. 목요일 밤은 자주 그렇다. 스크린도어가 열리고, 출입문이 열렸다. 소리는 손에 쥔 휴대폰을 깨워 시간을 확인했다. 9: 28 PM. 지하철에는 다르지만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이 서 있다. 다들 누군가에게 목례하는 석고상처럼 휴대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출입문이 닫히려는 순간 누군가 잽싸게 지하철에 아슬아슬하게 올랐다. 스크린도어가 닫히고, 출입문이 닫히자마자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코끝을 스치는 비릿한 냄새. 희미하지만 세월이 묵은 냄새에 소리는 두리번거렸다.
석고상들이 하나같이 비켜 선 곳은 바로 노약자석이었다. 냄새의 진원지다. 그곳에는 노숙자가 잠의 세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천장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입을 헤벌쭉 벌린 채 들숨과 날숨을 이어갔다. 노숙자의 행색은 초라했다. 언제 감았는지 추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떡진 머리가 가장 먼저 소리의 눈에 들어왔다. 최대로 에어컨을 틀 정도로 푹푹 찌는 한여름인데도 그는 파카를 입고 있었다. 파카는 바삭하던 표면이 습기를 머금으며 납작하게 눅눅해진 식빵 같았다. 누빔 바지 바깥으로 내복이 삐죽 나와있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그의 전재산일 법한 잡동사니도 GS25, 알파문구 등이 박힌 비닐봉지에 겹겹이 싸여있다. 그 남자는 춥다.
남자가 앉아있는 노약자석 근처는 텅 비어있었다. 출입문이 열리자마자 쇼핑백을 든 중년의 남자는 노약자석으로 성큼 걸어오다가 남자를 발견하고선 인상을 찌푸린 채 옆칸으로 이동했다. 진짜 누구도 앉지 않았다. 남자의 옆자리는 일종의 금단의 구역이다. 누구나 탐내지만, 쉽게 차지하지 않는 금단의 구역. 신대방역에서 굵은 파마 머리에 손가방을 단단히 쥔 여자가 남자 옆에 앉았다. 그런데 자꾸만 그의 치맛자락이 금단의 구역을 넘어선다. 자신의 무릎 높이보다 의자가 높아 지하철이 출발하고 멈출 때마다, 속력을 낼 때마다 두 다리가 허공에서 흔들거렸기 때문이다.
소리는 석고상들이 주저한 곳에 섰다. 저들과 섞이고 싶지 않았고, 저들의 일상에 소리의 일상을 겹쳐지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무표정한 석고상 사이에 소리는 자신의 무표정까지 더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리는 물과 기름처럼 일상을 배제하고, 낯선 곳으로 가고 싶었다. 그곳은 어디일까. 다음 정거장에서 사람들이 올라탔다. 소리는 이름 모를 사람들을 쳐다봤고, 비슷한 석고상의 눈들을 피하지 않고 쳐다봤다. “이봐요. 나는 아직 살아있어요.” 소리는 재킷 주머니에 든 휴대폰을 꺼내지 않고 만지작거렸다. 약지에 낀 반지를 매만지듯 휴대폰을 문지르고, 쓰다듬고, 톡톡 두들겼다. 소리는 오늘 헤어지자는 통보를 받았다.
세 정거장이 지나면 소리는 지하철을 갈아타야 한다. 2호선에서 4호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인파에 몸을 섞어야 하는데 문득 내리고 싶지 않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파마를 한 여자는 꾸벅꾸벅 졸기까지 한다. 비염이 있는 걸까. 냄새를 맡지 못하는 걸까. 그 남자는 2호선 순환선을 타고 몇 바퀴나 돌았을까. 내친김에 소리는 제자리로 모든 걸 되돌리고 싶었다. 소리가 그 남자와 그 여자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환승하라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오는 와중에 에어컨 바람이 강하게 불어왔다. 사당역이다. 지하철 문이 열리고, 브레이크 소리가 들렸다. 치이이익. 소리는 닭살 돋은 팔뚝을 문질렀다. 소리는 생각했다. 남자의 용기가 부러웠다. 어떤 곳에서도 내리지 않고 다시 한번 되돌아오는. 여자의 무딘 상태가 부러웠다. 잠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않는.
2019.0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