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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감인간 Sep 29. 2019

엽편 02. 하룻밤

짧은 소설입니다. 마지막이 되어버린 우리의 밤에 관하여

나는 그 밤을 잊지 못한다. 우리는 평소처럼 펍에서 술을 마시고, 근처에 잠을 청할 만한 곳을 찾았다. 유독 큰 창문이 난 그 방에는 희뿌연 빛이 비집고 들어오고 있었다. 단출한 곳이었다. 낡은 탁자와 의자 두 개. 탁자 위에는 유리로 된 물병과 유리잔이 놓여있었다. 한쪽 벽에는 허름한 옷장이, 그 맞은편에는 침대보만 간신히 정리한 침대가 놓여있었다. 나는 이미 몇 잔을 들이켠 보드카 덕에 취기가 올라 눕고만 싶었다. 내 몸은 이미 술에 담긴 몸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눕자는 생각만 되뇌며 몇 발자국 뗐을 뿐인데 걸을 때마다 바닥에서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끼익. 끼익. 나는 바닥의 나무판자가 어긋나는 소리에 선잠이 깼다. 아까만 해도 절정을 치닫던 취기는 잠잠해졌지만 머리가 지끈거렸다. 온전한 밤을 향해 달리는 시간. 나는 눈을 뜨지 않고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러다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녀였다. 그녀는 방 안을 뱅뱅 맴돌고 있었다. 그녀의 발걸음 끝에는 자꾸만 삐걱거리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가만히 귀 기울이다 보니 그녀는 부러 판자가 어긋나는 곳만 밟는 듯했다. 내가 뻗어있는 침대 쪽을 향해 걸어올 땐 삐걱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렸고, 침대 맞은편 낡은 옷장 곁을 지날 법한 곳에선 소리가 한층 더 멀어졌다.


출처 pixabay

판자의 아귀가 맞지 않아 생긴 어긋난 소리는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반복했다. 처음에 거슬리던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릴 때쯤 유독 뒤틀린 소리 하나가 내 귀에 꽂혔다. 묵은 시간을 버틴 판자의 소리는 신경질적으로 날카로웠다. 잠이 달아난 나는 그 소리를 꾹 참고 있던 와중에 그녀가 발걸음을 멈췄다. 나는 잠결에 뒤척이는 척 침대에서 몸을 돌려 실눈을 떴다. 그녀는 멀거니 서서 탁자 위에 놓인 물병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물병의 입을 톡톡 두드리더니 물을 따랐다. 그리고선 중얼거리듯 혼잣말을 했다. “이제 물 한 잔 마시는 일 따위나 소용 있는 일이라니.” 유리잔을 들고 창가로 향한 그녀는 짙은 어둠이 깔린 바깥을 가만히 바라봤다.


불현듯 스치는 불행한 예감은 대체로 틀리지 않는다. 좋은 예감보다 나쁜 예감의 적중률이 더 높은 것처럼 느껴지기 마련이다. 좋은 건 쉬이 잊히지만, 나쁜 건 기억에 박히기 때문이다. 오만한 해석이지만, 좋은 예감은 나 자신에게서 비롯되고 나쁜 예감은 나를 둘러싼 사람, 상황, 관계에서 싹을 틔운다. 이런 면에서 보면 그녀는 싹수 있는 여자였다. 여느 여자들과 달리 거침없었고 당찼다. 돌이켜보니 나는 늘 그녀에게 ‘예의를 차리라’라고 신신당부했다. 3년 전의 시작부터 오늘의 끝까지. 그 자리에 머물지 않는 그녀로 인해 나에게 닥칠 ‘불행의 씨앗’을 예감했으리라. 내가 재촉할수록 내 곁을 맴돌던 그녀는 나를 벗어나려고 했다. 당연한 수순이다.


나는 은근하게 감도는 취기를 찾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우리처럼 어긋난 판자 소리를 자장가 삼아 다시금 잠에 들었다. 유예시키고 싶은 그 밤은 그렇게 사라졌고 선명한 아침이 찾아왔다. 그녀는 말끔하게 단장을 마친 상태였다. 지난밤 맨발로 방 안을 서성이던 그녀는 떠날 채비를 하듯 구두를 신고 창가에 걸터앉아 바깥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우리의 시간이 막바지에 치달았고, 이제 서로를 비켜갈 앞날만 남아있다는 사실이 만져질 것만 같았다. 나는 몸을 웅크리며 침대보를 머리까지 끌어올렸다. 흩어진 줄로만 알았던 술 냄새가 짙게 올라왔다.


20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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