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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너울 Aug 07. 2023

허한 마음의 연대기

그 시작점의 기억들 

웬걸. 애써 내 속을 들여다봤더니 내 눈에, 손에 걸리는 것은 나의 허한 마음이었다. 소화할 수 없는 그 마음을 현명하게 다루고 싶어 나는 과거와 현재를 뒤적거리며 내 허한 마음의 연대기 비슷한 것을 만들었다. 틈날 때마다 되새겨지는 기억들을 모아 구슬처럼 꿰면 전체적인 색이나 모양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였다. 그 연대기의 첫 시작이 다음의 두 장면이다.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 나는 당시 살던 집 부엌에 있던 빈 공간에 종종 들어가 있곤 했다. 부엌에는 냉장고를 넣도록 설계되어 벽감처럼 쑥 들어간 공간이 있었는데, 그 공간에 비해 냉장고가 작아서 또 하나의 틈새 공간이 생겼다. 어린애 하나 들어가기 딱 좋은 크기였다. 


내가 거기 들어가 있을 때는 주로 우리 집에 친구들이 놀러 왔다가 다 돌아간 후였다. 소란스러움이 뚝 떨어진 집이 허전했다. 집에 완전히 혼자 남은 게 아니라 엄마가 계셨는데도, 내일이면 학교에서 또 볼 수 있는 친구들인데도 그랬다.


마음이 심히 허전해 어쩔 줄 몰라하던 그 상태를 혼란스러워했던 기억이 있다. 그나마 허한 마음을 더 커지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 작은 몸을 작은 틈에 밀어 넣는 것이었다. 비좁은 곳에 몸을 꼭 끼워 맞추면 허함도 더 커질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어지간히 커지고 나서는 할 수 없는 방법이었고, 나도 자연스레 그 방법을 잊어갔다. 


역시 비슷한 시기로 내 나이 10살 전후 즈음, 극장에서 영화를 다 보고 나올 때도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영화관을 나올 때면 온 마음이 하얬다. 마치 희게 텅 빈 것처럼. 엄마 손을 꼭 잡고 극장을 나오면서 이런 얘기를 했더니 영화를 보는 동안 파토스를* 경험하고 나서 감정의 해소를 겪어 그런 거라고 했다. 어릴 때라 엄마의 말이 곧바로 와닿지는 않았다. 파토스라니, 애한테 너무 어려운 용어가 아닐까? 그러나 엄마, 아빠는 내게 그런 용어를 종종 써서 뭔가를 설명해 줬다. 카타르시스나 이데올로기 같은 단어들. 아무튼 나로서는 풀이가 안 되던 기분에 이미 해설이 마련된 개념이 있다 하니 조금은 마음이 놓였던 기억이 난다. 



어느 날은 이 기억들이 유독 잘 떠올라서 침대에 나란히 누운 동생에게 이 두 가지 이야기를 하며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내 어떤 면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하는 고민을 담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을 했다. 동생은 조용히 듣고 있다가, 나더러 언니는 뭔가와 헤어지는 게 아쉬운 감정이 큰 사람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내밀었다. 


헤어짐이라. 확실히 뭔가를 떠나보내는 일은 아쉽고 저어된다. 헤어질 때 느낄 아쉬움을 관계의 중반부터 걱정하곤 한다. 어떤 친구를 어려워하다가, 혼자서 갑자기 그 친구에 대한 고마움과 친근함이 깊어졌다가, 지금의 만남이 우리의 인생 시기에 따라 멀어질 생각을 하며 지레 아쉬워하곤 한다. 떠나보내는 것이, 너무 아쉽다. 갑자기 내 앞의 당신, 혹은 무언가에 대한 애틋함이 증폭되는 기분을 느낀다. 아쉬움이 닦아내기 힘든 잼처럼, 꿀처럼 내 팔에 진득하게 붙는다. 그렇게 나를 어딘가에 붙들어두려고 하는 감정들이 있다. 애써 닦아내 모른 척해도 한동안은 피부에 남아 끈적끈적하게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런 감정들. 


그 중에서도 헤어짐을 걱정하게 만드는, 헤어짐 전후로 나를 덮칠 아쉬움. 동생의 말을 듣고 유년기의 그 두 장면에 아쉬움을 대어 본다. 대어 보니 이질적이지 않고 결이 섞여드는 기분이다. 


예전에 나를 상담해주셨던 심리상담사 선생님은 마음 속을 헤매는 일은 미궁을 헤매는 일 같다고 하셨다. 입구와 출구가 따로 있는 미로와 출입구가 동일한 미궁은 다르다. 미궁의 특성을 잘 알았던 아리아드네는 그래서 테세우스에게 실타래를 건넨 것이다. 여러 감정과 심상이 뒤엉킨 마음은 잔뜩 엉킨 실타래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성인이 된 후에도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이 허한 마음이 그 자체로 미궁이라면, 미궁의 중심에는 이 잔뜩 엉킨 실타래가 있겠지.


나는 여러 개의 실이 얽힌 것인지, 아니면 하나의 긴 실이 꼬일 대로 꼬여버린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없는 실뭉치의 한 가닥을 비로소 골라냈다. 아쉬움의 감정을 시작점으로 하여 허한 마음을 한참 헤매고, 그 실을 다시 잡고 따라 나와서 다음 편의 줄글들로 옮겨 보련다. 



*파토스: 일시적인 격정이나 열정. 또는 예술에 있어서의 주관적, 감정적 요소.[출처: 네이버국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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