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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그루 Nov 10. 2023

각성

아빠에게 큰 소리를 쳤었다. 절임배추 힘들잖아, 우리도 상인들이랑 계약하자. 관리도 우리가 안 해도 돼. 절임배추는 조금만 하고 나머지는 다 상인한테 맡기자.


큰 소리를 치고 지인에게 건너건너 계약을 했다. 아빠는 끝까지 탐탁치않아했지만, 대신 네가 끝까지 책임지라고 하셨다. 당연하지! 몇 달 전의 나는 의기양양했다.


그리고 어제 나는 한 시간을 펑펑 울었다.


첫 번째 상인은 행방불명. 중간 관리자의 횡포 아닌 횡포로 배추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을때도 이도저도 못 하던 소개해준 지인언니.


언니와 찾아온 다른 상인은 우리 배추밭만 사지 않았다. 아니, 거저 주워가려고 했다.


순간 떠오르는 장면들. 나는 편하게 여행간다고 유럽에 있을 때 식구들이 폭우속에서 울면서 심던 배추들. 새벽부터 두 시간에 한 번씩 깨면서 물돌리던 아빠의 부루튼 입술. 무엇보다 우리 부모님이 처음 농사를 시작했을 때, 상인들만 목빠지게 바라봤을 때, 우리 배추밭만 지나치고, 헐값에 주워가려던 상인들. 몸은 축나고 마음도 병들던 부모님.


내가 그 때와 똑같은 상황을 만들었구나. 부모님 볼 낯이 없어서 부끄럽고 미안해서 울었다.


그 값이면 차라리 갈아엎는다. 속상한 아빠는 연신 담배를 피웠다.


아빠는 담배를, 엄마는 한숨을, 나는 눈물을 쏟고나서 우리는 머리를 맞댔다. 그리고 플랜B를 세웠다. 우리는 한 번 더 도박을 하기로 했고 이 플랜의 끝이 대박일지 쪽박일지 모른다.


하지만 마음만은 가득하다. 나는 이번에 큰 교훈을 얻었다. 예전 우리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1. 이 세상에 쉽게 돈 버는 법이라는 건 절대 없다. 아무리 상인에게 계약재배한다고 해도 애초에 물건이 좋았어야했다.


2. 누구를 탓할 것 없다. 잠깐 미워할수는 있으나 결국에는 끝까지 내 책임이다.


3. 우리 부모님이 배추상인들과의 트라우마로 시작한 직거래인데 그걸 내가 무슨 자격으로 어그러뜨리려했을까. 내가 해야하는 일은 부모님이 편하게 농사짓는 방법이 아니라 더 많은 손님들에게 더 많이 우리를 알리는 방법에 집중하는 것이다.


4. 직거래, 그러니까 고객에게 집중하자. 한 분 한 분 손편지에 진심을 담던 초심으로 돌아가서 고객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자. 오는 연락을 귀찮아하거나 힘들어하지 말고 가슴벅차게 감사하자.


5. 일론 머스크의 '서지'처럼, 높은 목표와 기한을 정해두고 나를 몰아붙이자. 중요한 건 왜 그래야하는지 비전이 뚜렷해야한다. 나의 비전은 우리 부모님을 해방시키는 것이고, 그래서 당장 집중해야하는 서지는 절임배추 고객 확대이다.


내가 자식인건 우리 부모님에게 조금 안 된 일이지만, 우리 부모님이 내 부모님이라 너무 감사하다. 곧 우리 부모님도 내가 딸이라서 너무 감사한 날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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