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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델리 Nov 28. 2017

우울증

아무렇지 않게 갑자기 훅 들어와 아프게 할퀴는


11월 _ 가을도 아니고 겨울도 아닌



우울하다.

이 한마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 상태가 되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지금 이 상태에 있다. 하루 종일, 혹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시작된 무언가가 나를 여기로 끌고 왔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화가 치밀고 사람이 싫고 세상 모든 게 다 마음에 안 든다.


지금에 와서 보니 오늘 하루 종일 모든 게 약간 틀어져 있었던 것 같다. 일주일 전부터, 혹은 한 달 전부터, 아니면 그 훨씬 이전부터 모든 게 다 엉망진창이었던 것 같다. 분노라고 불러도 될만한 격한 무언가가 속에서 내면을 녹여버릴 듯 뜨겁게 용솟음치는데, 말은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힘이 없다.


한 한 달 전부터 간헐적 단식을 한다고 아침을 거르고 있었는데, 오늘 아침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먹어봤자 무슨 맛일지 뻔한 아주 단 핫 초콜릿을 샀다. 도대체 왜. 그런데 심지어 돈 낭비의 주범인 핫 초콜릿의 맛이 아주 형편없었다. 그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바리스타에게 화가 났다. 오전에 들었던 누군가의 퇴사 뉴스도 싫었고, 팀원 중 한 명이 오전까지 줘야 할 자료를 오후에 넘겨준 것도 싫었다. 맨날 안에서 도시락을 먹다가 오랜만에 나가서 밥을 먹었는데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메뉴를 고른 것에도 화가 났다. 고객에게서 이런저런 말을 들어야 했던 것도 싫었고, 이 멍청한 사무실에 계속 앉아 있어야 한다는 것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지긋지긋했다.


퇴근 즈음에 갑자기 엄마가 지난달 아버지 생신에 10만 원만 받았다며 섭섭했다는 말을 전했다. 나는 분명히 20만 원을 드렸는데. 모든 정황을 따져봤을 때 나는 분명 20만 원을 드렸고 엄마도 20만 원을 받았는데 엄마가 어디서 착각을 하셨는지 모르겠다. 계속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때 기분 좋게 드렸던 두툼한 봉투를. 엄마의 섭섭했다는 문자를. 그게 기분을 확 가라앉히는데 큰 공을 세웠다. 퇴근 후 요가하러 가서 거울에 잘 비치는 자리에 앉아서 몸을 푸는데 늦게 온 사람이 홀랑 내 옆에 앉아서 거울을 가려버렸다. 동작을 할 때마다 내 몸이 아니라 그 여자의 몸이 보여서 짜증이 났다. 비켜. 나는 아직 거울이 필요한 수련자라고.


요가를 끝내고 감자와 양파를 사려고 요가원 옆 야채가게에 들렀다. 가격은 싼데 너무 많은 거 같아서 집 앞 슈퍼에 왔는데 덜 싱싱한 야채가 더 비싸고 양이 훨씬 적었다. 왜 그냥 거기서 사지 않았지. 후회하는 내가 싫었다. 룸메가 같이 운동을 가자고 해서 필라테스를 하러 갔는데 오늘따라 선생님이 내가 못하는 동작만 시키는지, 아니면 내 몸이 오늘따라 더 못 쫓아가는지, 계속 자세가 나오지 않았다.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이게 대체 무슨 동작이지. 평소에 몇 번 하던 동작인데도 더 이상 따라 하기 싫어졌다. 오늘따라 힘들게 시키는 것 같은 선생님이 괜스레 밉고, 선생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는 내 저질 몸뚱이도 싫었다.


두 달 전 받은 건강검진 결과에 콜레스테롤이 너무 높고 갑상선 자극 호르몬도 높아서 내진을 받아보라길래 집 근처 내과에 갔다. 의사 선생님이 한 달간 생활습관과 식습관을 개선해보고 한 달 뒤에 다시 혈액검사를 해보자고 했는데, 번번이 먹고 싶은 욕구, 놀고 싶은 욕구, 자고 싶은 욕구를 조절하지 못하는 내가 싫다. 대체 뭐가 문제지. 왜 콜레스테롤은 남들보다 배는 높은지. 육식도 별로 안 하고 야채도 열심히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하는데 왜 뱃살은 줄지 않지. 왜 몸무게는 계속 늘지. 나라는 인간에게 희망이 없는 것 같다.


그냥 모든 게 다 싫다.

내 기분을 상하게 하는 남들이 싫다.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내가 싫다.


여기까지. 분노가 내지른 글을 다시 찬찬히 읽어본다. 대체 뭐가 문제인지. 결국은 내가 싫은 거다. 멍청한 선택을 계속하는 내가 싫고, 저질 몸뚱이를 가진 내가 싫고, 내 망할 기분을 조절하지 못해서 다른 사람들의 기분까지 가라앉게 만드는 내가 싫다. 더 큰 문제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거다.


나 자신이 끔찍하게 싫어지면 어떻게 해야 하지. 따뜻한 차를 한잔 마시면서 마음을 가라앉혀야 하나. 괜찮다는 심리상담가를 추천받아야 하나. 스트레스엔 폭식이지. 치킨을 시키고 맥주를 들이부어야 하나. 그 어느 것도 내키지 않는다. 나는 그냥 이렇게 주절주절 키보드를 두들긴다. 아무도 읽지 않을, 아무도 읽지 않았으면 좋겠을 글을 써 내려간다.


처음에는 이런저런 말로 기분을 풀어주려던 룸메도 계속되는 내 무반응에 할 말을 잃었나 보다. 1년 정도 같이 살면서 그래도 볼꼴 못볼꼴 거진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건 처음이다. 이렇게 밑바닥도 없이 마음이 추락한 꼬락서니를 보여서 어쩌면 좋니. 난 정말 쓰레기야. 재활용도 불가능한 완전 쓰레기.


부엌 한편에서 룸메가 끓이는 카레 냄새가 보글보글 퍼진다. 고소한 향신료 냄새가 집안에 가득한 냉기 사이로 스며든다. 냄새가 좋다. 잘 시간이 가까워 오는데 오늘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다. 그냥 이렇게 화가 난 채로, 이렇게 자책을 하면서 잠자리에 들긴 싫은데. 그것 말고는 또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다.


탁, 불을 끄고.

잔다. 내일은 오늘보다 좋은 날이겠지.

오늘은 완전 밑바닥이고, 난 완전 쓰레기였으니까.

내일은 적어도 재활용이 가능한 쓰레기가 되면 되지.


그래, 오늘은 똥이지만 내일은 깡통이 될 거야.



imageⓒ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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