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셋째 주 키위 이야기
지난주 금요일부터 월요일까지 부활절 연휴 기간이라 일이 없었다. 그리고선 계속 날씨가 우중충하니 비가 왔다가 멈췄다가, 땅이 미처 마르기도 전에 다시 비가 내리기를 반복했다. 날씨 탓에 픽커들이 키위를 못 땄다. 과일이 없으면 일도 없다. 일주일 동안 3시간 일했다. 일주일 동안 하루를, 그것도 겨우 3시간을 일하고, 일주일치 방세 120불을 냈을 때 작은 한숨이 나왔다.
여기 사람들은 어떻게 차가운 아침을 견디는지 모르겠다. 차가운 우유나 요거트에 시리얼을 박박 비벼먹으면서 빈 위장을 깨우다니. 으슬으슬한 날씨 탓인지, 매일 따끈한 국이 빠지지 않던 엄마의 밥상이 오늘따라 더 그리워졌다. 일은 못해도 노숙하긴 추운 날씨라 방세는 나가고, 일은 못해도 밥은 먹어야 하니까. 돈 아끼겠다고 산 슈퍼마켓 브랜드의 요거트와 시리얼을 앞에 두고 또 한숨이 나왔다. 영 숟가락이 안가네.
빈털터리에 일도 없는 나를 구제해줄 햇살도 없으니, 바람이라도 맞으러 나가야겠다. 신발끈을 단단히 매고 지도를 들고나갔다. 비치 로 Beach Road 를 따라서 걷기로 하고 시원하게 쭉 뻗은 길을 따라 걸었다. 작은 우산을 챙겨 나오긴 했지만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이 상황에 비까지 오면 기분이 정말 눅눅해질 것 같아서. 장마철에 뜯어서 먹고 며칠 그냥 놔둔 김 몇 장처럼.
길 양 옆으로 키가 아주 큰 나무들이 쭈욱 늘어서 있었고, 차도 별로 없는 길에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뭔 나무가 이렇게 많나 싶어 가까이 가서 안쪽을 보니 뭔가 일렬로 쭉 심어져 있었다. 궁금하긴 한데 더 가까이 가긴 어려워서 카메라로 줌을 쭈우욱 당겨 보니 키위 나무였다. 이게 다 키위 과수원이었어! 내가 상상했던 키위 나무의 모습과는 약간 거리가 있었지만, 키 작은 나무 사이사이로 털이 송송난 그린키위가 주렁주렁 매달린 걸 보니 내가 다 뿌듯하고 기분이 좋았다.
아, 길가에 이렇게 심어놓은 나무들이 키위 과수원의 울타리 역할을 하는가 보구나. 자연친화적이고 좋은걸. 다시 아무도 없는 평일 낮의 도로를 걸었다. 귀여운 우체통 무리와 마주치기도 하고, 또 다른 키위 과수원을 발견하기도 했다. 구름은 낮았지만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다.
이때 무슨 생각을 하며 걸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무슨 노래를 들었는지는 기억한다. 걷는 내내 Maroon 5의 노래를 들었다. 그날도, 그 전날도, 그다음 날도. 카티카티에 있는 동안 산책을 할 때도, 마트에 장을 보러 갈 때에도. 걸을 때면 늘 <Songs About Jane> 앨범을 들었다.
걷다 보니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닷가에 닿았다. 짠 공기를 훅 들여 마시고 잠시 앉아서 책을 읽었다. 한국에서 가져온 여행기였다. 오클랜드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이미 거의 다 읽었지만, 한국어 책이 한 권뿐이라 또 들고 나왔다. 노래를 듣고 책을 읽고 수평선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한 조각의 푸른 하늘을 보고. 다시 노래를 듣고 책을 읽고. 바람이 불면 파도가 철썩하고 치고, 그 바람을 타고 갈매기가 날아갔다.
한껏 우울한 기분에 빠져 있다가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은 왔던 길보다 짧은 기분이 들었다. 가는 길에 만난 작은 치즈 냥이 때문일까. 고양이와 부비부비 하면서 한참 있었는데도 훨씬 수월하게 돌아왔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한결 가벼워진 마음 때문인가 봐. 나와서 딱히 대단하게 한 건 없지만, 긴 길의 한쪽 끝에는 바다가 있고, 그 반대편 끝에는 내 작은 침대가 있는 숙소가 있다는 게 마음이 놓였다. 오늘 밤에 잠이 들면 이 길을 걷는 꿈을 꿀 것 같다. 양 옆으로 아주 키가 큰 나무가 늘어선 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