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상담 11회
도돌이표처럼 계속 나오는 가족이야기, 도돌이표처럼 돌아오는 의문들, 도돌이표처럼 갇혀 있는 생각의 굴레 — 이 모든 것에 지친다. 했던 얘기를 또 하고 했던 얘기를 또 하고. 술에 취하지 않은 상태로 끝나지 않는 만취를 경험하고 있다. 정말이지 지긋지긋하다. 매번 마주 앉아서 같은 이야기를 하고 같은 답답함에 빠지고 같은 의구심이 들고 같은 시간에 상담이 끝나면 남은 한 주를 보내면서 다시 같은 우울의 바다에서 허우적 댄다. 대체 언제까지?
나는 옛날부터 오직 한 가지를 얘기하고 싶어 소설을 썼고, 그에 대해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아 질 때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계속 쓰고 싶습니다. 이 책은, 그 집요한 역사의 기본형입니다.
작가의 말
『키친』 중에서
제가 괴로운 점은요. 제가 마주하고 있는 문제들이 아주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왜 그 별것도 아닌 문제가 이토록 저를 괴롭게 하는가 — 그거예요. 가족이나 사회적 문제로 인해서 발생한 트라우마의 리스트를 만들 수 있다면, 제 트라우마가 그 리스트의 말미에라도 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누구나 자라면서 부모로부터, 사회로부터 어느 정도의 트라우마는 갖기 마련이니까요. 사실 훨씬 더 심각한 일들도 많잖아요. 그런데도 다들 살아가잖아요. 남들도 다들 비슷한 상황들을 겪으면서 사는 것 같은데 왜 나는 이게 이렇게까지 괴롭고 이 상태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까. 그게 답답해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에요.
선생님은 고통에 대한 역치가 낮은가 보죠, 라고 답했다. 사소한 문제인데 그렇게까지 괴로워하는 건 고통의 역치가 낮다는 의미가 아니냐고. 그러면 저는 이제 이 역치를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거죠? 그냥 약하게 태어났으니까 고통받으면서 늘 엄살 부리고 징징거려야 해요? 성격상 엄살 부리고 징징대는 걸 못하겠는데, 그럼 어떻게 해요? 선생님은 그럼 그냥 그렇게 괴로워야죠, 라고 말했다. 별 문제 아닌 걸로 나는 괴로워한다, 비슷한 무게를 지고도 다들 잘 살아가는데 나는 왜 이럴까 — 이렇게 생각하는 게 결론적으로는 내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냐고 물었다. 왜 스스로를 문제라고 규정하냐고 물었다. 하아… 이것도 언제 한 번 나왔던 얘기 같은데.
사실 충분히 징징거릴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징징대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고, 그럴 수 있는 순간이 있고, 그럴 수 있는 자리가 있을 뿐이다. 보통은 사람들을 카테고리로 나눠서 그 카테고리에 맞는 정도로만 오픈해서 대하고 있고,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도 100%를 오픈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100%에 한없이 가깝긴 하지만. 나의 생각과 감정은 대부분 나 혼자만의 몫으로 남아 있다. 스스로도 소화하지 못하는 생각과 감정을 남에게 불쑥 말했다가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니까. 선생님은 나의 전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못해서 아쉽냐고 물었는데, 나는 아쉽지 않다. 전혀 아쉽지 않고, 그저 이런 식의 조절을 계속해야 하는 게 피곤할 뿐이다.
주변에서 남들이 하는 말, 평가 같은 것에 영향을 많이 받고, 눈치도 많이 본다. 그러면서 내가 나 스스로를 단속한다. 나는 시니컬한 농담과 장난을 좋아하고 애 같은 면이 있다. 주제에 따라서 쉽게 흥분하기도 하고 그러면 가뜩이나 큰 목소리가 더 높아지지만, 보통은 조용히 내 할 일을 하는 걸 좋아한다. 소음과 냄새에 민감해서 사람 많은 곳을 꺼리고 자연 속에 있는 걸 좋아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많은 면 중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그걸 어떻게든 밖으로 보이지 않으려고 한다. 그렇게 한쪽 면을, 혹은 여러 면을 누르고 있으니까 지속적인 조절이 필요하다. 실수로라도 시니컬한 농담이 어울리지 않는 상황에서 농담을 던지면 집에 가서 내가 왜 그랬지, 이불킥 하는 게 괴롭기도 하고.
사회적인 관계에서 의도치 않게 누구든 실수를 할 수 있고, 그러면 그 실수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필요하다면 상대방에게 적절한 사과를 하면 된다. 머리로는 이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마음은 실수라는 건 애초에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한다. 그러면서 실수할까 봐 미리 조심하라는 경고를 계속 날린다. 사람들을 만나고 어울리는 걸 좋아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조절도 부단하게 해줘야 하니까 에너지가 배로 든다. 지금이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일이 별로 없고, 오래 만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괜찮다…가도 안 괜찮다. 대부분 어느 정도 나를 파악하고 있는데, 이 사람들이 말하는 내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더 죽여야 할 부분들이 아직도 많다.
선생님은 그런 성격이 뭐냐고 물었다. 자기주장이 강하고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앞장서서 일하는 걸 좋아하고, 사람을 쉽게 버리지 않으며 미리 일을 계획해서 하는 편으로 디테일에 민감하다. 내 귀에는 고집이 세고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하며, 오지랖이 넓고 계획에 강박적인 와중에도 쓸데없는 디테일에 집착한다는 말로 들린다. 어차피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나는 유명 노래 가사에 나오는 것처럼 “Big laugh, big voice, big personality”의 전형적인 케이스다. 덩치가 크고 목소리도 카랑카랑하고 나름 하는 일에 진지해서 소그룹에서 의견 개진도 열심히 하는 적극적인 성격. 그렇게 행동하다 보면 자꾸만 여러 사람들 앞에 서게 되는데, 그게 너무 부담스럽고 싫어서 그런 자리로 나를 이끄는 모든 속성들까지 다 싫어진다. 나는 내 존재가 큰 게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죽음의 해결책은 더 긴 삶이 아니다. 절망의 해결책이 희망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죽음과 절망 모두 같은 약을 필요로 한다. 수용이다. 보부아르처럼 몽테뉴도 결국 받아들였다. 마지못한 수용이 아니라 완전하고 관대한 수용이었다. 죽음에 대한 수용이기도 했지만 삶에 대한 수용이자 자기 자신에 대한 수용이기도 했다. 자신의 긍정적 성격에 대한 수용이자(“자신을 실제보다 낮추어 말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어리석은 짓이다“) 자신의 결점에 대한 수용이었다.
몽테뉴처럼 죽는 법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중에서
결국 돌고 돌아 문제는 이거다. 머리로는 살면서 실수도 할 수 있는 거라고 하는데, 마음은 실수는 절대 하면 안 되는 거라고 한다. 머리로는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는 게 불가능한 일이라고 하는데, 마음은 모두를 만족시키고 싶어 한다. 머리로는 크기가 어떻든 나라는 존재 자체를 사랑하자고 하는데, 마음은 어떻게든 나를 작게 만드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머리로는 이미 지나간 일은 돌이킬 수 없으니 그만 놓아줘야 한다고 하는데, 마음은 계속해서 같은 부분을 들여다보고 괴로워하고 들여다보고 괴로워한다. 다른 일에 마음이 팔려서 잠시 들여다보지 않길래 잊었나 싶으면, 아무도 없는 밤에 잠이 안 올 때면 다시 꺼내서 들여다보고 또 괴로워한다. 대체 왜 그래?
내 문제의 대부분은 마음이 머리의 말을 들으면 해결될 것들이다. 선생님은 왜 마음이 원하는 걸 머리가 부정하냐고 했는데, 내 입장에서는 왜 마음이 머리를 못 따라가는지 모르겠다. 내 마음인데 왜 내 마음대로 되지를 않지. 머리가 친절하게 충분히 설명한 일들을 왜 마음은 받아들이질 않지. 짜증 나게 얘는 정말 왜 이럴까. 학생 때도 심리 상담 가서 뭘 얻고 싶냐고 하면 “마음의 평화“같은 같잖은 소리를 하곤 했는데, 아무래도 마음이 평화롭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되니까 더 강철 같은 이성을 가지려고 했던 것 같다.
선생님은 내가 자꾸만 마음을 알아주지 않고 누르기만 하면서 압사시키려고 하니까 더 반발하는 거 아니냐고 했다. 마음이 컨트롤되지 않는 것 — 그게 문제의 핵심이다. 머리라고 마음을 이유도 없이 죽여버리고 싶은 건 아니다. 머리는 마음과 달리 꽤나 이성적이다. 그동안 머리는 마음을 얼러도 보고 달래도 보고 온갖 방법으로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려는 내 발목을 잡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도 이 멍청한 마음이 계속 불편한 문제 옆에서 밍기적거리면서 문제의 실밥이라도 뜯어와서 조금씩 조금씩 쌓아놓았다. 그 실밥의 무더기가 이제 거대한 실타래가 되었다. 어디가 시작인지, 어디가 끝인지 알아보기도 어렵다. 지독하게 엉켜 있다. 한 번에 확 불을 질러 통째로 소각시켜 버리고 싶다. 머리랑 손잡고 강 건너 불구경을 하고 싶다.
선생님은 이제야 마음과 몸이 비슷비슷해지면서 서로 대화를 하는 것 같다고, 서로 얘기를 잘 들어주고 같이 잘해볼 기회라고 했다. 나는 그냥 나라는 존재 자체가 너무나도 피곤하다. 선생님은 복잡한 거라고 바로잡아 주었는데, 나는 복잡한 내면세계가 있는 게 싫다고 하소연을 했다. 단순하고 해맑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바람이, 자꾸만 내가 아닌 걸 바라는 그 마음이, 내가 나 스스로를 부정하는 그 행위가, 내가 나일 수 없도록 만든다. 이렇게 귀결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머리로는 알아도 마음으로는 여전히 조그마하고 무해한, 단순하고 해맑은 사람이 되고 싶다. 피노키오처럼 그런 사람인 척하고 살다 보면 언젠가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때도 있었다. 이제 피노키오는 동화인 걸 안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걸, 생긴 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걸, 머리도 마음도 다 안다. 꼬불꼬불 복잡한 내면을 가진 큰 사발면으로 살아야 하는 거야. 한 번에 실타래를 소각할 수 있는 방법은 정녕 없냐고 선생님에게 물었지만, 하나씩 풀어나가야 한다는 답답한 소리가 돌아왔다.
그러면 풀어야 할 첫 번째 실밥은 뭐냐고 물었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답이 오긴 했지만 내가 원하는 답이 아니었다. 그러니 돌아오지 않은 거나 진배없다. 죽어도 말을 안 듣는 마음, 이 녀석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머리처럼 논리적이지도 않고 자기 상태를 제대로 설명도 하지 않는 이 멍청한 녀석을 정말 어쩌면 좋지? 말이 안 통하는 애랑 어떻게 대화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