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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델리 Oct 20. 2015

벙어리 펭귄

너도 떠나 보면 나를 알게 될 거야 #09


벙어리 펭귄

Brisbane, Queensland

Australia



알람 없이 일어나 운동화 끈을 단단히 묶고 선크림으로 무장을 하고는 집을 나섰다. 아파트를 벗어나 평일 대낮에 한산한 길을 두 번 건너고 몇 블록을 더 걸어내려와서 브리즈번 강을 따라 걷는 길에 접어들었다. 길에는 커다란 나무와 온갖 꽃들이 만발하고, 날씨는 반짝였다.


걷고 싶으면 걷는다. 아무 때건. 일에 쫓길 필요도 없고, 어디까지 가야 한다는 목표점이나 몇 시까지는 돌아가야 한다는 한계점도 없다. 어차피 불러주는 데도 없고 할 일도 없는 백수니까. 걷고 싶으면 걷는다. 그만 걷고 싶을 때까지. 걷다가 잠시 상념에 빠졌다가, 다시 걷고 있는 자신에게 돌아와 걷는다는 사실에 조금 더 집중한다.



느릿느릿 흐르는 강물 위로 햇살이 부서져 내리고, 하얀 요트가 정박한 요트 선착장 앞에 선 거대한 암벽을 바라본다. 전에 지나갈 때는 활기찬 분위기였던 곳이었다. 건강해 보이는 사람들이 줄 하나에 의지해 거친 암벽을 오르는 걸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곳.


하지만 오늘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깎아지르는 절벽 아래 꽃다발이 여럿 놓이고,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이 자리에 함께 하지 못한 누군가를 추억한다. 눈물이 흐르고 어깨가 떨리고 끝내 고개를 떨군다. 아직은 앳된 청년의 웃는 얼굴이 꽃 위에 앉아 있었다. 분명 좋은 사람이었겠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고 눈물짓는 걸 보면.


살면서 때로 끼 있고 능력 있고 아름다운 사람이나 인정받는 사람, 또 착하고 좋은 사람들이 젊은 나이에 죽는 것을 보면, 하루하루 나이만 먹어가는 나는, 그 어느 것도 가지지 못해서 나이만 먹어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씁쓸해진다. 지금껏 살면서 큰 사고 없이 살아온 것에 감사하다가도, 문득 이런 순간에 입맛이 쓰다.


잠시 절벽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가 이내 다시 걷기 시작했다. 불현듯, 아니면 방금 본 풍경이나 그에 대한 어떤 상념 때문인지 몰라도, 하루 동안 묵언을 해보기로 한다. 2주째 일도 없이 놀고 있는 상황에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어떤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하루는 이틀이 되고, 삼일이 되었다.

한참을 만나지 못한 한 친구가 멀리서 날 찾아 브리즈번에 왔다. 바쁜 거리 한 모퉁이 카페에서 친구가 대신 주문을 하고 우리는 천천히 공을 들여 대화를 나눈다. 눈으로, 손으로, 그리고 마음으로.


지난 며칠 동안의 경험으로 말이 아니더라도 의사소통에는 큰 어려움이 없음을 깨달았다. 통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서로의 뜻을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 굳이 입을 통하지 않더라도 많이 있다. 왜 말을 하지 않는 게 수행의 한 방법인지까지는 아직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뭔가 관점의 변화는 확실히 느껴진다.


말은, 가장 쉬우면서도 때로 큰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또 가끔은 잔인한 방식이다.



친구와 눈을 맞추고, 웃고, 메모를 하며 한참 이야기를 하다가 카페를 나서기 전에 카운터로 가서 근처에 편의점이 있는지 물었다. 노란색 메모지에 큼직하게 쓴 한 문장에 카운터에 서있던 그녀의 얼굴이 한 톤 밝아졌다. 그녀는 카운터로 몸을 깊숙이 숙여 내가 소리도 듣지 못하는 사람인 것처럼 아주 크고 선명한 입모양으로 분명한 손짓과 함께 길을 알려 주었다.


호주에 도착한 이후 만난 어느 누구도 그녀보다 친절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얼굴이 입을 열어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어떤 말을 했을까. 표정으로 그녀의 감정이 충분히 느껴졌지만, 그에 알맞은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때로 어떤 일이나 감정에 대해 적당한 말을 찾는 일은,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 같다.


친절한 그녀에게 노란색 메모지를 건넸다.

말을 잃어버린 나의 마음을 담아서.


"Thank you for your kind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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