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새의 그림책 편지 #8_2016년 9월 28일
요즘 저는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지내요. 회사에 다닐 때처럼 여전히 책도 만들고요. 새로운 기획거리를 다듬고, 여러 작가들과 함께 프로젝트 작업도 하고, 글도 쓰고, 한 달에 몇 번은 작은 마을로 가서 할머니, 할아버지 들과 함께 그림책 만드는 수업도 합니다. 글과 그림이 완성되는 과정은 지루하고, 힘들고, 그래서 손에 쥔 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시간을 견뎌야 할 때가 더 많아요. 그 지난한 시간을 거쳐 조금씩 구체적인 글과 그림을 그려내는 기쁘고 반짝거리는 순간들을 만나고 만나고 만난 뒤에도, "이제는 완성일까? 이제 정말 최선일까?" 하고 끊임없이 반문하며 출간으로 다가갑니다.
이제 시작점에 있는, 그래서 아무것도 손에 쥔 게 없는 것 같은 불안감에 쫓기는 젊은 작가들과 함께 책을 만들 때, 가장 많이 하는 말.
"이야기를 억지로 만들거나 꾸미지 마세요! 그건 가짜예요."
하지만 그럼, 진짜 이야기란 뭐죠? 어떻게 하면 진짜 이야기를 쓸 수 있죠?
어느 날, 제가 사랑하는 한 사람이 이 책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언니, 이거 진짜 내 얘기야. 너무 신기해."
작가 오사 게렌발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훑으며 자신의 내면을 바라봅니다. 가족으로부터 끊임없이 상처받고 그 상처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며 지키려는 분투의 기록. 작가가 말했듯 "지극히 개인적인" 작가 자신의 삶에 대한 내용이지요.
사실이 아니라는 오해를 살 정도로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었고, 이전에도 그 사람을 통해 들었지만 완전히 알지는 못했던 그 사람의 삶과 내면에 대해 아주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어요.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오사 게렌발의 이야기였지만, 그랬습니다. 나에게도 그 사람과 비슷한 면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그 사람과 더 가까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요.
오사 게렌발은 책의 말미에 이런 글을 남겼어요.
한국 독자들에게
나는 15년 동안 그래픽노블을 쓰고 그려왔다. <그들의 등 뒤에서는 좋은 향기가 난다>는 나의 아홉 번째 작품이며 스웨덴에서 2014년에 출간되었다. 어떤 면에서는 같은 책을 반복해 쓰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내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한층 더 깊이 파헤치면서 새로운 각도와 새로운 버전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시각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나이 들어감에 따라 어린 시절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가는 게 당연하지만 기억에 있어서만큼은 나는 내 어린 시절로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간다. 마치 탐정처럼 내 마음속의 어두운 구석을 캐내고 탐험하면서 그 속에 감춰져 있던 무언가가 점차 수면 위로 명확히 떠오르는 것을 본다.
내 책들은 거의가 내 이야기다. 그러나 각기 다른 구성에 인물들 또한 저마다 다른 특색을 띠고 있다. 내 책이 지극히 개인적이며 내 삶에 대한 내용이라고 털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매번 바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옮긴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스웨덴에서는 북극광 현상을 볼 수 있다. 우주 광선과 대류권 위쪽의 자기권 플라스마에 의해 일어나는 현상으로 그 광경은 절정의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하지만 이 광경을 보기 위해서는 어떤 다른 광원의 방해도 없이 칠흑같이 어두워야 한다. 이는 곧 내가 책을 쓰는 방식이자 북유럽의 스토리텔링 전통에 대한 상징이다. 절대적인 어둠속에서만이 진정 가장 아름다운 빛을 볼 수 있고 하늘로부터 쏟아져내리는 금가루의 향연을 누릴 수 있다.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오사 게렌발
이 책을 읽은 뒤 그 사람과 만난 날, 우리는 깔깔거리면서 이 책 이야기를 했고 서로 어느 부분이 좋았는지 무엇이 자신의 이야기와 똑같았는지 말했어요. 주로 나는 듣고, 그 사람이 말했지만요. 그 사람은 "나처럼 이 책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옮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세상에 많다는 게 더 놀라워"라고 말했어요.
나는 이 책을 떠올릴 때마다 그 사람이, 그 사람과 했던 말과 자신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그리고 어느 곳에선가 이 책을 읽고 "이건 내 이야기인데!"라고 생각할 내가 모르는 다른 사람들도 함께. 그래서 "절대적인 어둠속에서만이 진장 가장 아름다운 빛을 볼 수 있고 하늘로부터 쏟아져내리는 금가루의 향연을 누릴 수 있다"는 상투적인 말이 매번, 새롭고 진실하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반드시 자전적인 이야기라야 진짜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아주 선명하게 남아 있는 어떤 날의 기억. 아마도 대여섯 살 무렵, 엄마 손을 잡고 신발 가게에 간 적이 있어요. 제 운동화가 작아져서였겠지요? 그리고 봤지요. 빨갛고 반짝거리는 작은 구두를!
'저 구두는 내 거야, 엄마가 당연히 저 구두를 사주겠지? 저렇게 예쁜 구두를 놔두고 다른 걸 고를 리가 없어.'
저는 분명히,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물론 사고의 과정이 이렇게 논리적이진 않았겠지요. 거의 직관적으로? ㅎㅎ) 하지만 엄마는 한참을 고르고 골라, 어떻게 생겼는지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평범하고 심지어 사이즈도 조금 큰 운동화를 내게 내밀었습니다. 아이의 발은 빨리 크고, 언제나 뛰어다니니까요. 나는 손가락으로 빨간 구두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어요.
"이거 아니면, 안 신을래."
엄마는 정말로 그렇게 했습니다. 아무것도 사지 않고 단호하게 신발 가게를 나왔지요.
그뒤로도 한참 동안 기억에 남아 있던 그 빨간 구두.
<핑크>를 읽고 그 구두가 떠올랐습니다.
비비는 핑크를 좋아하는 아이입니다. 학교에는 '진짜 핑크'를 잔뜩 가지고 있는 핑크공주들이 있어요. 비비는 그 애들을 부러워합니다.
어느 날 오후, 비비는 선물 가게 진열장에서 '진짜 핑크'를 발견합니다. 핑크색 드레스를 입은 반짝거리는 신부 인형이었지요. 비비는 신부 인형을 실컷 구경할 수는 있었지만 가질 수는 없었지요. 아무리 심부름을 해서 용돈을 모아도, 신부 인형은 도저히 살 수 없을 정도로 비쌌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비비는 엄마 아빠와 소풍을 가기로 했습니다. 핑크 놀이를 위한 소풍이었지요. 엄마는 딸기잼 샌드위치와 앵두차를 준비합니다. 빵집에 들러 핑크로 꾸민 작은 케이크도 사고요. 아빠의 트럭을 타고 온통 핑크색으로 물든 공원으로 향했습니다.
세 사람은 주변에 있는 핑크를 발견할 때마다 수첩에 하나씩 적어 둡니다.
핑크 꽃잎, 아기 담요, 꽃을 든 여자아이의 옷, 벚꽃, 조각 케이크, 새끼 쥐의 귀.
집으로 돌아가는 길. 비비는 엄마 아빠에게 자신의 진짜 핑크를 보여주기로 했어요. 수첩에도 적고요. 그런데 신부 인형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핑크공주 메릴리가 신부 인형을 사서 가져가버렸던 것입니다. 아빠가 비비를 안아주려 했지만 비비는 아빠를 밀쳐 냅니다. "힘내고 어서 와!" 엄마가 소리쳐도 비비는 땅만 보고 터덜터덜 걸어갑니다.
마음이 돌덩이처럼 무거울 때 빨리 걷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니까요.
아빠는 모든 걸 가질 수는 없다고 말하지요. 그리고 이런 말도 합니다.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멋진 음악을 만드는 법이란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 앞으로 해가 지고 있습니다.
나무들 저 너머로 진짜 핑크가 하늘을 물들이고
두 사람을 물들입니다.
모든 걸 가질 수 없지만
모든 걸 다 가진 것 같은 순간은, 한번씩 오는 법입니다.
밋밋하고 평범한 이야기 가운데 작지만 특별한 어떤 것이 기억을 건드릴 때, 그게 마치 내 이야기인 것 같이 느껴져 그 이야기를 좋아하게 됩니다. <핑크>는 제게 그런 책인 것 같아요.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도 아니고, 내 이야기와도 같지 않지만(제 엄마 아빠는 저렇게 다정스럽지 않았지요) 마치 나에게 하는 이야기인양 읽게 되는.
빨간 구두는 가질 수 없었지만, 빨간 구두를 가진 것보다 더욱 충만했던 어떤 기억들이 떠올라 내 마음도 잠시 핑크로 물들었습니다. 가질 수 없는 빨간 구두뿐만 아니라, 내 옆에 있는 핑크 꽃잎, 아기 담요, 꽃을 든 여자아이의 옷, 벚꽃, 조각 케이크, 새끼 쥐의 귀를 기억하고 수첩에 잘 적어놓고 싶어집니다. 그러면 언젠가 진짜 이야기를 쓸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이 순간, 정말 슬픈 일이 뭔지 아세요?
<핑크>가 절판되었다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