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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미영 Jun 29. 2024

내겐 너무 이쁜 기억들

영화 ‘왓 데이 해드’ 스틸컷.

나의 할머니는 알츠하이머였다. 4남 2녀의 셋째였던 아빠가 할머니를 지극히 생각하는 마음에 서울로 모셨건만 할머니에게 서울살이는 버거웠다. 오래지 않아 할머니는 알츠하이머에 걸려서 큰아버지가 있는 부여 본가로 내려가셨다. 그리고 10년을 넘게 앓다가 돌아가셨다.     


한집에서 살았어도 말도 표현도 많지 않던 할머니는 나에게 닿지 않는 존재였다. 그래서 할머니에 관한 기억을 가까스로 꼽자면 알약을 잘 삼키지 못하던 어린 나를 위해 칼로 마늘을 빻듯 약을 빻던 모습이 전부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할머니는 명절에 부여 큰집에서 마주하면 나에게 평범한 말을 건네다가도, 이내 내가 앉은 방바닥을 가리키며 구렁이 몇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다고도 했다. 할머니도, 할머니의 말도 무섭진 않았다. 말로 풀어낼 수 없는 여러 감정들이 나의 심장에 녹진하게 엉겨붙을 따름이었다.  


오래 전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밤, 나는 예사롭지 않은 꿈을 꿨다. 우리집 베란다에서 영묘한 존재가 스르륵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때 전화벨 소리에 눈을 떴고, 아빠는 나에게 할머니의 임종을 담담히 전했다. 할머니에게 나는 그저 셋째 아들 재원이의 큰딸 미영이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잊지 못할 마침표를 찍어 주고 가셨다.  


'기억상실증'이라는 드라마 여주인공 서사에 어울릴 법한 이력이 생긴 나에게 일상은 외적으로는 큰 변화가 없다. 그러나 안에서는 이따금 격랑이 소용돌이친다. 우선 물건을 잃어버리면 기억을 잊어버린 것으로 치환한다. 또한 평소처럼 솔 톤으로 말하다가도 상대가 나의 말을 의심하면 파로 미로 도로 톤이 툭툭 내려간다. 속울음이 심장을 타고 흐르다가 누군가 나를 향해 기억 운운하면 무겁게 침잠한다.


물방울도 한곳에 계속 떨어지면 바위를 뚫는다. 나에게 혹여 그런 날이 찾아들까 두렵다. 기억의 맨홀에 빠진 나에게 필요한 손길은 무엇일까.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기억이다. 


내겐 너무 이쁜 기억들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하나씩 각인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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