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티태스킹은 기본이지요
2020년 9월의 글을, 2022년 11월에 다시 발행합니다.
완전히 마무리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저도 모르게 감정적이 되어 마지막 문단을 쓰고 임시저장 해버렸음이 자명하네요 :) 2년이 지난 지금, 저는 이 글을 쓸 때보다 더 많이 '엄마 내공'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 가치를 이해하고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조직이 더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I'm a woman, I multi-task.” (나 여자잖아, 동시에 여러가지 하지.)
지난 19년 말, 뉴질랜드 총리 저신다 아던(Jacinda Kate Laurell Ardern)이 미국 Late Night Show의 스테판 콜버트(Stephen Colbert)를 공항에서 픽업하여 이동하면서 인터뷰를 진행할 때 했던 말이 한동안 화제가 되었습니다. (기사 원문 : https://www.sbs.com.au/news/i-m-a-woman-i-multi-task-jacinda-ardern-hangs-out-with-stephen-colbert-in-nz)
‘나 엄마잖아, 동시에 여러가지 하지.’ 로 잠시 와전되기도 했던 그녀의 말은 ‘운전하면서 인터뷰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던 스테판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습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제대로 소화해야만 하는 여성들의 능력을 압축적으로 보여준 문장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멀티태스커(multi-tasker)라는 단어를 비교적 늦게 접했습니다.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하는 사람’을 정의하는 단어가 있다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제가 살아온 (음악가의) 세계에서는 죄악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다양한 관심사를 가지고 동시다발적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을 용인할 뿐만 아니라 장려하기도 하는 세상이 있다는 것이 저에게는 믿기지 않는 해방감이었습니다. 예술가의 길을 걷다 직장인이 된 것이 그토록 행복한 이유입니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거듭할수록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이 가지는 의미가 단지 직장 생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점점 알게 되었고, 그 정점에는 바로 육아가 있었습니다. 글자로 배우고 머리로 이해하던 그 의미가 제왕절개 후 수술 통증이 조금씩 회복되는가 싶던 출산 4일차부터 차츰 피부로 와 닿기 시작했습니다.
신생아는 먹는 동시에 잠을 잘 수도 있습니다. 혼자 누워 있을 수도 앉아 있을 수도 없는 아기는 온전히 엄마의 팔과 몸에 작은 전신을 의지하고 잠이 듭니다. 어른처럼 식탁에서 밥을 다 먹고 잠자리에 가서 잔다거나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죠. 집에 아기와 저만 남아있는 어떤 주말, 아기는 수유 중 평화롭게 잠이 들고 저 또한 앉은 채 잠시 졸다가 그만 사래가 들렸습니다.
저의 큰 기침 소리가 가까스로 잠든 아기를 깨울까봐 제 입을 틀어 막아보았지만, 헛기침도 아닌 사래 들린 기침은 정말 멈추기 어려웠습니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아이가 깨어나면 그 투정은 말할 수 없고 다시 잠을 재우기도 쉽지 않다 보니, 저는 물이라도 마셔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물을 마시려면 몸을 일으키고 아기 안은 팔을 빼서 선반 속의 컵을 꺼내고 주전자의 물을 따라야 합니다.
한 손은 아기 몸 아래를 받치고 다른 한 손에 젖병이라도 들고 있다면 물 마시기는 불가능할 수 있습니다. 진퇴양난입니다. 자다 깨어 우는 아기를 달래어 다시 재우는데 드는 리소스, 기침을 최대한 참아내는 데 드는 리소스, 어느 쪽을 감당하고 실행할 것인지 머리를 빠르게 굴려보았습니다. 이럴 때 집안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원망스럽지만, 어차피 아기가 깰까봐 큰 소리로 사람을 부르지도 못했을 겁니다.
공감이 잘 되지 않는다면 어쩌면 자다 깨어 우는 아기를 직접 달래본 적이 없으셨을 수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업무 현장으로 바꾸어 설명해보겠습니다. 공연 현장 책임자로 동분서주 하는 날, 관객 입장 2분을 남겨놓고 백스테이지에서 출연자 한 명이 넘어져 다치는 사고에 놀라 뛰어가려는 순간 티켓 부스 쪽에서 입장권 교환을 기다리던 고객 한 명이 소리소리 지르며 상급자를 찾는 것과 유사하다고 할까요. 물론 다 큰 어른들을 다루는 것과 생존 자체가 스스로 불가능한 아기를 다루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이지만 말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동시에 몇 개의 일까지 한번에 처리해 봤을까? 가까운 과거 작년 하반기, 서비스운영 팀에서 CS와 컨설팅을 동시에 진행하던 때를 회상해 보겠습니다. 저는 그 때 상품기획 PM에서 서비스운영 팀장으로 발령을 받아 7-8명의 팀원과 새롭게 만난 상황이었습니다. 몇 개월간 바로 옆 라인에서 일을 했으나 업무상 동료일 때와 팀장-팀원으로 만났을 때는 사뭇 다른 입장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가장 먼저 CS와 컨설팅 프로세스의 현황을 파악해야 했습니다. 조금 익숙해지자 바로 고객 응대 실무를 같이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루에 수백 건 상담을 처리하다 보면 때때로 주변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를 잘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관리자이므로 각 팀원들의 현황도 상시 모니터링해야 했습니다. 녹취 기능이 없기에 실시간으로 통화 내용을 들으며 문제 상황을 발견해내고 빠르게 판단하여 적합한 대처 가이드를 주어야 했습니다.
하루 종일 고객관리 플랫폼을 들여다보는 동시에, 회사의 새로운 전략이 세워질 때마다 ‘운영 프로세스를 놓치지 않도록’ 함께 검토하고 챙기는 것도 저의 역할이었습니다. 팀 이동 전에 하던 신상품 기획과 제휴 실무도 여전히 일부 담당하고 있었고, 간혹 강성 민원에 대응하여 정책을 점검하고 고객을 직접 응대하는 일들도 있었습니다. 서로 입장이 다를 수 밖에 없는 운영과 기획 사이를 계속해서 오가는 것이 참 어려웠습니다.
다시 육아 상황으로 전환해 보겠습니다. 하루 중 가장 조용한 ‘아이 낮잠 시간’이 되면 마음이 바빠집니다. 일단 빨래부터 시작하는데요, 아기가 어리면 아기옷과 어른옷은 분리하여 세탁하니 항상 손이 두 번 가고 시간이 두 배 걸립니다. 더불어 아기가 깨면 바로 필요할 ‘새 젖병’과 분유를 타기 위한 ‘식힌’ 물도 준비해야 하므로 포트의 전원을 켜고, 물의 온도가 올라가는 동안 세탁기에 빨래들을 넣습니다. 세제를 넣고, 용도에 맞게 세탁기 다이얼을 맞추고, 잘 돌아가는지 확인하고 돌아서며 포트의 물이 끓어오르는 것을 확인합니다.
아기와 내가 어질러 놓은 온갖 책이나 딸랑이들과 가재수건들을 부지런히 주워 담습니다. 동선을 잘 계산해야 한 번에 돌면서 다 수거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지그재그로 같은 공간에서도 수없이 왕복해야 하죠. 이쯤 되면 포트의 물이 팔팔 끓고, 그러면 이제 젖병을 소독할 때입니다. 큰 통에 끓는 물을 부어 잠시 젖병통을 이리저리 돌려주며 이유식과 수유의 텀 시간 계산을 해봅니다. 어린 아기들은 이유식과 수유를 병행하기 때문에 타이밍도 잘 맞추어야 합니다.
갓난쟁이가 아니라 기관을 다니는 유아라면 등원하고 하원하는 시간, 어느새 바뀌는 계절과 그날 그날의 활동에 맞는 옷, 아이가 기관에 가 있는 사이 해결할 집안일과 돌아온 후의 간식, 저녁 준비가 무한 반복입니다. 도우미를 고용한 가정이라면 아이와 도우미와 부모가 쓸 돈과 시간의 적절한 분배, 이동시간 공백이나 단기방학에 대처하는 보호자 대안 마련, 전담 한 명으로 해결할 수 없는 아이의 일과를 여러 이해관계자와 각종 사교육 기관과 빈틈없이 촘촘하게 조율하는 관리를 모두 낮 시간 동안 해결해야 합니다.
동시에 생각하고 실행해야 하는 일들 각각의 것을 보면 모두 크고 대단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대부분이 즉시성과 실시간성을 버릴 수 없는 일들입니다. 업무 현장에서나 육아 현장에서나 ‘운영’ 맥락은 다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 때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내공은 무엇일까요? 순간적으로 우선순위를 판단하는 능력, 얽히고 설킨 일들의 효율적인 방법을 측정하는 능력, 간결한 메시지로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능력 같은 것들입니다.
모든 결정의 순간에 단 한 가지만 제대로 완수하면 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대개 복합적인 조건에 복합적인 의사결정이 끼어듭니다. 그래서 누군가 한 사람은 이를 교통 정리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 책임지고 실행을 해야 하죠. 회사에서는 그것이 대표, 부서장, 중간관리자 팀장일 수도 있고 현장담당 팀원 본인일 수도 있습니다. 가정에서는 특히 육아에 있어서는 아이를 안고 있는 주양육자 혹은 일터에 나가서도 전체 상황을 총지휘해야 하는 엄마일 수 있습니다.
눈 앞이 깜깜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백데이터 하나 없이, 대안 리소스 하나 없이, 내 결정을 기다리는 급박한 일들이 갑자기 발밑으로 몰려드는 날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정말 도망치고 싶어집니다. 눈 감아버리거나 그냥 무너져버리는 게 더 쉬울 수도 있다 싶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나를 붙잡고 있을 때’ 엄마는 그런 선택을 할 수 없습니다. 강제로, 아이의 생존을 걸고, 도망치지 않는 힘을 키우게 되는 것입니다.
절망할 때도 많고 울면서 허우적댈 때도 많습니다. 내 뜻대로 안되는 일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에 좌절도 하고 아무도 나를 돕지 않는다는 분노의 원망이 마구 뻗어나가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상황을 돌파할 방법을 찾아내고, 때론 부서지거나 상처 입으면서라도 무너진 하늘을 뚫고 나옵니다. 점차 힘을 조절하고 배분하는 요령도 생기고, 처음보다 그 다음에 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도 있게 됩니다. 참으로 혹독하게, 그리고 단단하게 맷집과 내공이 쌓여가는 것입니다.
난이도 높은 직장 생활을 하더라도 분초단위의 도전을 받고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낙담조차 끼어들 틈 없이 연속으로 경험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저는 육아의 터널에 끼어있던 시간을 뒤로 하고 직장으로 돌아왔을 때, 아무리 업무가 몰아친다 해도 정신차릴 틈이 어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저보다 더 많은, 더 다양한 연령의 자녀들을 양육하는 어머니들이 직장에서 여러 일들을 한꺼번에 차곡차곡 정리하고 쳐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육아가 애초에 그녀의 책임 일부로 포함되어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육아 또는 직장 중 한 쪽에 좀 더 몰두할 수 있는 동료들에 비해 상상을 초월하는 업무량을 소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사실 그녀를 둘러싼 환경의 부당한 불균형의 결과이기도 해서, 조직에서 또는 그녀의 가정에서 반드시 다른 사람들이 동참하여 해결할 문제이기도 합니다. 불균형이 더 줄어들 수 있도록 이 사회도 계속해서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저 사람은 저렇게 다 하고 있다니, 대단해’ 따위의 칭송으로 끝날 일이 절대 아닙니다.
본인의 또는 동료의 ‘도망치지 않는 힘’을 아직 체감해보지 못하셨나요? 어쩌면 육아로 쌓은 능력을 업무에서 충분히 발휘할 기회가 아직 당사자에게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평화로운 시기에는 맷집이 그 위력을 잘 드러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극단의 상황으로 내몰릴수록 잘 단련된 버티는 힘이 든든하게 받쳐줄 것입니다. 아무 데이터가 없어도 생존 더듬이 같은 직관이 현명한 선택을 도와주고, 무엇보다 지금 당장 행동에 옮겨 살아남을 길을 찾게 될 것입니다.
마음 약해진 동료가 당황하여 고객에게 임기응변으로 거짓된 해명을 둘러대려 할 때 그 전화를 대신 받아 정직하게 사과하고 개선 방안을 바로 실행할 수 있는 힘, 배포 직전 누락된 경로를 발견한 제품팀이 망연자실 할 때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 대처 프로세스를 재빨리 잡으며 일단 배포하라고 안심하라고 말해줄 수 있는 힘, 스타트업에서 바닥부터 차곡차곡 쌓을 시간이 없었던 저의 담대함은 육아로부터 왔습니다. 사랑스런 나의 아기는 매일 밤 나에게 절망을 주었지만 어느새 흔들리지 않는 회복탄력성을 저에게 선물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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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어지간히 하고 싶은 얘기였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