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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씨 Mar 23. 2020

화를 다루는 법에 대하여.

아이 생일 그리고 짧은 휴직 28일 전의 글.

주말에 아이와 남편의 일대 충돌이 있은 후 생각보다 그 후유증이 길다. 아이는 내가 출근하고 없는 사이 누구보다 의지하고 어리광을 부리는 이모님에게 어제 일을 방금 겪은 일마냥 울며 이야기 나눴다고 한다. 그것도 그냥 징징대며 말한 게 아니고 자기가 스스로 머리를 찧어가며 울더란다.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은 어제 남편의 태도였다. 그는 화를 내면 주변 모두가 눈치를 보게 만드는 신기한 마력을 가졌다. 예전에는 주변 친구 선후배 동료들이 그 눈치를 보느라 애를 먹었을 것이고, 사업을 시작한 후로는 직원들이나 거래처들이 어지간히 마음 고생 했을테다. 내가 그 심정을 잘 이해할 수 밖에 없는 건, 나 역시 남편의 '성질'에 눈치를 보는 대표적인 사람 중 하나이기 때문일테다. 결혼 전 연애가 짧았던 터라 남편의 '화냄'을 처음 접한 것은 결혼 날짜를 두어달 남겨둔 때였다. 한겨울 추운 길바닥에 주저앉아 펑펑 울 정도로 멘탈에 충격을 준 사건이었지만 (십여 년 전 그 밤길의 찬바람조차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풀리는 과정이 무척 찜찜했음에도 이후 결혼 전까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비슷한 일이 재발하지 않아서 그대로 결혼식장에 입장했었다.


그 후로 수없이 많은 날들동안 남편의 '화냄'과 마주해야 했다. 내가 어려웠던 건 그의 '화냄' 방식이 도무지 나의 예측과 다르게 전개되었기 때문도 있었지만, 그런 불같은 화를 마주하면 나 역시 완전히 움츠러들거나 (이럴 땐 비겁하고 비열해짐다) 통제 못하고 폭발하는 바람에 상황이 말도 못하게 난장판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타인의 화'를 만날 때 얼마나 왜곡된 시선으로 이에 반응하는지는 결혼하고 8년차 쯤 되었을 때 아주 우연하고 아픈 일들을 겪으며 깨닫게 되었다. 그 깨달음은 내게 엄청난 통증이자 위로가 되었다. 덕분에 상황에서 한발짝 물러서는 지혜와 용기를 가끔 불러오기도 한다. 물론 나는 아직도 '타인의 화' 특히 '남편의 화'를 다루는 방법을 연습 중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에게 내가 하는 것과 같은 '화를 다루는 연습'은 당연히 기대할 수 없다. 아이는 미성숙하고 경험이 짧으며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조차 잘 설명하지 못하는 존재다. 마흔 살이 넘은 성인도 자신의 충동을 잘 조절하고 조리있게 감정상태를 설명하며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경우가 희소한데, 고작 만 여덟 살도 되지 않은 아이에게 무슨 그런 세련된 자기조절과 감정 표현을 바란단 말인가! 그런데 어제 남편은 무자비하게 화를 낸 걸로도 모자라 아이의 미숙한 어깃장을 그대로 맞받아쳐 버렸다고 했다. 길거리에서 자동차를 세워두고 시비를 붙어도 그보다는 덜하련만, 만 여덟 살도 되지 않은 아이의 언행을 애비가 그대로 되갚아준 것이었다. 아이는 한참을 아빠 눈치만 보며 다가가지 못했다. 그럴 때 모른 척 아이를 한번 불러 안아주고 '이제는 그러지 마' 한 마디면 될텐데, 남편은 먼저 숙이고 들어가는 법이 없다. 그게 '사랑하는 아내'라고 지칭하는 나일 때에도, 심지어 세상을 본인보다 오분의 일 밖에 살지 않은 저 조그마한 존재에게조차도 그렇다.


나 아닌 다른 이를 탓하는 것도 잠시, 뒤이어 내가 충분히 아이의 마음을 다독여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스며들었다. 함께 놀러 나갔다가 울며 먼저 집으로 들어온 아이를 앉혀놓고 화를 내며 집안을 오가는 남편을 못본 척하며 이런 저런 말들을 늘어놓았다. 이제 와 후회되는 건 애초에 아이 방으로 들어가 조용히 대화를 시작하지 못한 거다. 급한 마음에 굳이 거실 한복판에 앉았더니 아이가 충분히 울지도 못하고 서러움을 쏟지도 못하고 쌩하니 곁을 지나가는 아빠에게로 자꾸만 시선이 흩어지고 그랬다. 그런 아이를 애써 내게로 집중시키면서 '네가 많이 속상했을 그 마음'과 '아빠가 그렇게 한 이유'를 이렇게 저렇게 설명하는데, 중간에 문득 이게 내가 이렇게 애쓸 일인가 싶었다. 나조차도 남편이 왜 그렇게까지 화를 냈는지, 아이가 정확히 무엇을 그렇게 서러워하는지, 내가 저지른 일도 아니고 내가 당한 일도 아닌데 어찌 다 변명하고 해석하고 이해해줄 수 있으랴?


그러니 아이의 마음을 온전히 풀어주는 데 실패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수도 있겠다. 나중에 화기애애하게 저녁식사를 다 마치고도 (물론 남편도 같이) 자러 들어가기 전 아이는 방 앞 한쪽에 시무룩하게 앉아있었다. 평소 그런 모습을 자주 보이던 아이가 아니어서 다 저녁에 외출한 아빠 때문인가 물었더니 오후에 아빠가 화를 많이 낸 일 때문에 슬프다는 거다. 하려던 놀이를 중단한 것도, 앞으로 기회가 없을 수 있다는 것도 속상하지만 '아빠가 나에게 화를 내서' 아이는 슬펐다. 그리고 나는 어쩐지 너무 안타까우면서도 아이의 좁은 시야가 답답한 나머지 '그게 그런게 아니라' 하는 끝없이 해명을 늘어놓은 다음 아이를 재워주었다. 


사실은 아이가 좀 더 울게 놔두었어도 좋았지 않았을까? 슬픈 마음이 어떤 모양인지 어떤 색깔인지 어떤 느낌을 몸과 마음에 가져다 주는지 충분히 그 감정에 들어갔다 나올 수 있도록 기다려줄 수도 있었을텐데. 알면서도 나의 기다림의 시간은 짧다. 어른인 내게 아이의 속도는 귀엽지만 답답했고, 아이에게 어른인 나의 속도는 고맙지만 숨쉴 틈도 없이 조급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아이는 덜 풀린 마음을 하루종일 끌어안고 있다가 다 늦은 오후에 이모님을 붙잡고 훌쩍이며 남은 말들을 쏟아냈는지도 모른다. 내가 조금 더 긴 시간을 아이 곁에 머무른다면 덜 다그치고 더 시간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여유가 필요하다, 나 하나만이 아니라 아이를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그게 휴직을 결정하게 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기억하면서, 결심도 하루치만큼 더하게 되는 오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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