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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씨 Mar 24. 2020

오늘 만난 '아빠' 한 조각.

아이 생일 그리고 짧은 휴직 27일 전의 글.

오늘은 하루종일 바빴다. 점심도 건너야 할 정도로 회의가 다닥다닥 붙어 잡혔다. 특히 내부 동료들과의 회의가 많은 날은 하나 끝나면 다음 회의 전에 앞선 내용 정리하고 다가올 시간 준비하느라 어떨 땐 물 한 잔 못 마시기도 한다. 다행히 오늘은 매 회의가 정확하게 시간 안에 끝나고 작지만 명확한 결과들도 나와 기분이 꽤 좋았다. 점심 시간을 건너뛴 보람 덕분에 허기를 잊을 정도여서 번개같이 다음 일정 준비를 하던 중 문득 깨달았다. 늦은 오후에 그 촘촘한 회의 사이 단 하나, 외부 손님과의 미팅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는 계속해서 내부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내부의 문제 해결에 몰두하게 되고, 계속해서 외부 분들을 만나면 대외적인 이슈에 몰입하는 편이라 몇 시간을 동료들과 우리의 당면한 문제들에 대해 씨름하다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낯선 분과 사교적인 제스처로 이야기를 나눌 생각을 하니 갑자기 피곤해졌다. 존경하는 사회 동료를 통해 소개받은 분을 만나 향후 협업 방향을 타진해보는 (흔하디 흔한) 그런 자리였다. 비록 시간이 얼마 안 남았지만 '멀리 나오지 않으셨다면 며칠만 미뤄서 만나자'는 무례한 연락을 드려볼까 하는 충동이 생길 지경이었다. 그래도 그건 예의가 아니지, 하는 내적 갈등을 끌어안은 채 당장 닥친 회의에 정신없이 임하다 보니 어느 틈에 손님 도착하실 시간이 되었다.


지인의 소개 덕분에 나름 친근한 인사를 나누고 어색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렇게 대략 십 분도 지나지 않아서, 나는 오늘 이 분을 만나지 않았다면 어쩔 뻔 했을까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두 아이의 아빠이자 IT회사 직원이었던 그 분은 '엄마와 아빠가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의 크기는 같은데' 아이들은 왜 부모에게 각각 다르게 반응할까 깊이 고민하다가 아빠와 아이 둘만의 프로젝트를 시작했다고 한다. (아이템을 밝힐 수는 없지만) 큰 아이와는 물리적으로 무언가 생산하여 금전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는 프로젝트를, 작은 아이와는 서로 기획과 실행의 역할을 나누어 공동의 결과물을 구현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하고 계신 것이었다! 오늘 나를 만나러 온 것은 부모이자 아이들과 접점이 있는 회사의 구성원으로 내가 이 프로젝트를 어떻게 느끼는가 듣고자 해서 오셨다. 세상에!  


일단 나는 이미, 아이들이 어릴 때 많이 바빠 떨어져 지내는 바람에 어느 틈에 거리가 많이 멀어져 있어서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최선을 다해 이를 좁히고자 노력한다 말씀하시는 지점에서 감동했다. 세상 모든 부모들이 같은 문제에 부딪혔을 때 그와 같은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다. 거리를 인식하는 순간 단념하기도 하고 강압적으로 거리를 좁히려다 부작용을 맞이하기도 하며 그 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감지를 하지 못해 다른 사고를 일으키기도 한다. 스스로 그 문제를 직면하고 해결하려 하기 보다는 타인의 손을 빌리려 하기도 하고 내가 아닌 다른 배우자를 무작정 탓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그 분은 굉장히 건강한 방법으로 정면돌파를 하고계신 거였다. 말투로 미루어보아 외국 생활을 어느정도 하셨겠다는 짐작이 가능했고, 그로부터 오는 수평적인 가족 문화의 경험치가 도움이 되었을 것 같았다. 


그 분에게는 죄송하지만 '아이와 아빠의 유대감'에 대한 부분과, 큰 아이와의 시간을 놓치면 안되겠다 싶었다는 지점에서, 그리고 작은 아이와의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아 그 때까지는 모든 것을 제치고라도 최우선 순위로 아이와의 프로젝트에 집중하고 정성을 쏟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씀하시는 지점에서 나는 더 이상 이 분이 들고 온 프로젝트나 제품에 관심이 사라져버렸다. 그것이 무엇이든, 아이와 아빠가 합심한 그 일이 무조건 잘 되었으면 하는 애정어린 바람과 더불어 가슴 밑바닥부터 번져오는 부러움에 숨을 쉬기가 힘들 정도였다. 이 대한민국 땅에서는 한두 명 '발견'하기도 어려운 존재라고 생각한 '아버지'가 이렇게 내 눈앞에서 말씀을 하고 있으시다니!


그 분의 열정 가득한 표정 너머로 나는 아이들의 행복한 얼굴이 보였다. 아빠와 함께 무언가 만들어내기 위해, 성취하기 위해, 목표를 달성하고 그 결과를 기쁘게 맛보기 위해 몰입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그렇게 예뻐 보일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싸한 느낌의 부러움이 온 마음에 몰아쳤다. 내가 가장 취약한 감정 중 하나가 부러움이고, 부러움이 내 안에 찰랑이며 가득 차면 나는 꼭 누군가에게 비겁한 행동을 해서 풀어내는 좋지 못한 습관이 있다. 주로 그 대상은 거울처럼 현실을 돌아보게 만드는 남편이고, 그 순간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아야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는다는 걸 과거의 숱한 경험으로 깨우치고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분을 배웅하고 남편에게 전화를 하려고 휴대폰을 손에 들었다.


그 때 회사 메신저 앱 알림이 울리면서 우리 팀의 친한 동료로부터 머리도 식힐 겸 라운지에서 잠깐 수다나 떨자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녀가 적정 시점에 등장하여 나를 라운지에 앉혀놓고 같이 커피를 한 잔 마신 덕분에 남편은 난데없는 비난 전화도 메시지도 받을 필요가 없어졌다. 방금 다녀간 그 분이 어떤 부모이고 어떤 아버지인지, 내가 우리 아이와 남편을 보며 무엇이 안타까운지 '잠깐 수다나 떨자'는 그녀에게 다 쏟아놓았으니까. 나는 나의 아이의 아빠가 다정한 사람이길 원했고 아이가 그 모습을 배우며 크기를 바랬었다. 이제는 그 기대가 내가 옭아둔 욕심일 뿐이고, 무리한 바람은 언제나 좌절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더는 남편을 '아이가 보고 자랐으면 하는 남성'으로 간주하지 않고 있지만, 문득, 그렇다면 나는 아이가 무엇을 보고 어떻게 배우며 어떤 사람으로 성장하기 원하는가 다시 고민이 되었다.


물론 남편은 오늘 나보다 집에 일찍 귀가하여 내가 이모님 퇴근시간 걱정 없이 하던 업무를 잘 마무리하고 온라인 컨퍼런스도 잘 마칠 수 있도록 '협조'하였다. 어떨 땐 깜짝 놀랄 정도로 실랑이할 필요도 없이 단박에 상황을 수긍하고, 어떨 땐 당황스러울 정도로 양보는 커녕 꿈쩍도 않는 모습을 보면서 늘 혼란스럽다. 감사한 일도 있고 절망적인 일도 늘 공존해서, 집안을 (그리고 남편과 나와 아이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음이 애매하다. 괜찮을 것 같다가도 하나도 안 괜찮을 것 같기도 한 불안감. 이럴 때 마음 편해지려면 결론은 하나밖에 없다, 휴직날이여, 얼른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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