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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진 Dec 15. 2020

꿈꾸는 나의 집

아빠 일기장을 몰래 읽었습니다

나는 인천 효성동에 있는 작은 빌라에서 태어났다.

이 집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작은고모까지 함께 살았다. 

일곱 명의 대가족이 한집에서 복작거리며 살았고, 방이 많은 집이 아니라서 우리 네 식구는 한방에서 지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 작은 방에서 옹기종기 모여 살았나 싶다. 


당시 아빠는 서른한 살, 엄마는 스물아홉 살로 지금의 나보다 어렸다. 

아빠가 동사무소 말단 직원으로 일하고, 엄마는 화장품 판매를 하며 자영업에 뛰어든 시절. 

가끔 사진 앨범을 펼쳐 그 시절을 보면 낡은 장판과 촌스러운 벽지, 오래된 풍경 안에 아장아장 걷는 나와, 

그런 나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젊은 엄마와 아빠가 있다. 


‘우와! 이렇게 조그마했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절을 사진으로 보면서 추억에 젖다가, 

엄마와 아빠의 젊은 시절에 시선을 옮겨본다. 

풋풋하고 생기 어린 시간이 신기하고 애틋하다.   

   

아빠의 월급이 백만 원 남짓 되던 시절, 

그 돈으로 네 식구 먹을거리를 해결하고 우리를 가르쳤다. 

좋은 옷을 입히거나 사교육을 시키기에는 빠듯한 형편이었지만, 

그들의 젊은 에너지와 남다른 잔머리로 이를 돌파해나갔다. 


당시 우리 집보다 형편이 나은 이모네 집에 가면 

언니들이 입던 옷이나 위인전, 학습백과사전 같은 전집 시리즈를 

빌려오는 건 일상이었다. 


매번 옷을 한 보따리 들고 와서, 하나씩 입어보고 가족들 앞에서 패션쇼를 열기도 했으니.


그때마다 아빠는 “오~ 이 옷 예쁘다! 부잣집 딸내미 같다!”라며 칭찬해주곤 했다. 

그런 시절을 거쳐,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쪼들리지 않고 편안한 때를 보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가끔 한방에서 옹기종기 모여 살던 그때가 떠오르곤 한다. 

이미 그 시절을 지나왔기 때문에 그리워할 수 있는 거겠지만, 생각하면 웃음이 나는 일도 많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당시에는 다양한 방문수업이 있었다. 

학습지부터 외국어, 미술 등 종류도 다양했다. 

동네 아이들 모두가 한두 가지는 기본으로 할 정도로 인기였다. 

우리 집 역시 ‘남들이 다 하는 건 우리도 해봐야지.’라는 마인드였다. 


엄마의 잔머리는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엄마는 오빠에게 꼭 연필로 학습지를 풀라고 당부하고, 

오빠가 다 풀고 채점까지 끝나면 일일이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 보관해두었다. 

그것들은 고스란히 내게 전달되었다. 엄마의 열정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수업하러 선생님이 집에 오는 날이면, 

엄마는 방에 있던 나를 슬쩍 불러 오빠 옆에 가서 조용히 앉아 있으라는 눈치를 주었다. 

그 당시 나는 어렸고, 엄마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거실에서 선생님에게 수업받는 오빠 옆으로 가서, 

멀뚱히 앉아 있다가 같이 수업을 듣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요즘 시대에 이런 식으로 아이를 교육한다면 쓴소리를 듣겠지만,

 그때만 해도 다들 없는 살림에 빠듯하게 사는 걸 알고, 

이런 꼼수를 눈감아주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엄마도 나름대로 염치가 있었는지, 

싫어하는 기색을 내비치는 선생님에게는 다음부터 이 방법을 시도하지 않고 후퇴했다. 

선생님이 나를 예뻐하거나 내가 흥미를 보이는 것은 이런 식으로 몇 번 앉아 있다가 

정식으로(?)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나중에는 선생님이 오빠와 나를 먼저 함께 가르쳐주겠다고 배려한 일도 기억난다.      


방문수업으로 방과 후 시간을 보내던 시절을 지나 학원에 다닐 때도 비슷했다.

당시 오빠는 동네에 새로 생긴 피아노학원에 다녔다. 

큰 가방에 피아노 교본을 넣고 다니는 게 얼마나 부러운지,

어린 마음에 다녀보고 싶다고 엄마에게 떼썼다. 


잠시 고민하던 엄마는 “그럼 한번 학원에 놀러 가봐.”라며 

오빠가 학원에 갈 때 나를 함께 보냈다. “어머~ 동생이랑 같이 왔구나.” 하며 선생님이 반겨주셨고, 

내 또래 아이들도 많고 활기찬 그곳이 마음에 들었다. 


오빠가 수업을 받는 동안 옆방에서 혼자 건반을 눌러보기도 하고, 

오빠가 피아노 치는 걸 구경하면서 몇 번의 공짜 체험학습을 했다. 

물론 그 뒤로 학원에 정식 등록해서 수업을 받을 수 있었고, 

5년이 넘도록 한 학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넉넉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하나라도 더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려 애쓴 두 사람. 

어떻게든 잘 살아내리라 에너지가 가득했던 시기. 

지금 내 나이에 두 분은 열심히도 살았구나 싶고, 

그들의 열성이 귀엽고 고맙다. 

가난하다고 행복하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팍팍한 현실이 답답할 때, 막연한 미래를 생각하면 두려워질 때가 있다.

 

‘언제 돈 모아서 독립하지?’, ‘노후는?’ 이런 걱정에 사로잡히는 날엔 괜히 울적해지곤 한다. 


그럴 때마다 엄마 아빠의 젊은 시절을 떠올린다. 

생기 넘침과 무엇이든 헤쳐 나가겠다는 의지, 에너지를 곱씹으며 나도 애써 힘을 내본다. 

그 시절 엄마와 아빠도 해냈으니 나 역시 오늘을 잘 이겨내고 살 수 있지 않을까. 

대책 없는 긍정이겠지만, 이렇게 과거를 떠올리고 나의 젊은 부모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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