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일기장을 몰래 읽었습니다
아빠가 쓴 일기에는 ‘가정’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당시, 아빠는 엄마와의 결혼을 생각하고 있던 때였다. 아빠가 엄마의 집에 인사를 다녀온 후, 자신이 어떤 가정을 꾸려야 하는지 고민했다. 그 글 중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아이를 키울 때 차별하지 말라.
아이는 어릴 때 엄하게 꾸짖고, 크게 자라면 꾸짖지 말라.
‘아직 결혼한 것도 아니고, 아이를 낳은 것도 아닌데 벌써 이런 생각을 하다니.’ ‘역시 미리미리 앞서 나가는 성격은 그대로네!’
이런 생각을 하다가 아빠가 어떻게 오빠와 나를 키웠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러자 아빠는 보통의 다른 집 아빠들과는 다르게 자녀교육에 더 열성이던 일들이 떠올랐다. 친구네 아버지들이 낚시하러 가거나 조기축구회를 할 때 김종호 씨는 집에서 오빠와 나를 붙잡고 공부를 시키거나 같이 공부하는 걸 좋아했다. 숙제를 챙기거나 문제집을 사는 등 공부와 관련된 것들이라면 하나하나 참견하면서 관여하길 즐겼다.
내 기억이 왜곡된 건 아닐까 싶어 엄마에게 물어보자 역시나 고개를 젓는 엄마.
“아유, 말도 마라. 너희 학교 끝날 시간만 되면 집에 전화하고 그랬잖아. 애들 집에 잘 들어왔냐고.”
출근해서도 잠깐 틈이 나면 집으로 전화해서 애들은 집에 잘 들어왔는지 체크하는 열정이란……. 아빠의 열정은 정말 남달랐다. 주말이면 우리를 앉혀 놓고 직접 숙제를 검사하거나, 영어 단어를 외우게 하거나, 한자 문제를 내곤 했다. 당시 우리 집에는 학원에서 쓰는 하얀색 화이트보드가 있었다. 아빠는 쉬는 날만 되면 화이트보드를 붙잡고 나름의 커리큘럼으로 수업을 했다. 《필수 영단어》, 《필수 영숙어》에서 몇 가지를 뽑아 영어 단어와 숙어를 쓰고 문제를 내어 맞히게 하기도 하고, 발음을 불러주면 우리가 스펠링을 받아쓰는 식으로 공부했다. 이 정도면 학교 수업 외에도 주말이면 ‘종호스쿨’이 열리는 셈이었다.
주말에도 이렇게 공부해야 하는 게 싫었을 법도 한데, 오빠와 나는 나름 성실하게 (군말하지 않고) 아빠의 지시에 따라 시간을 보냈다. 사실 우리가 아빠의 말을 잘 따른 건, 아빠가 주는 당근 때문이었다. 그날 성적이 좋으면 우리가 먹고 싶은 피자나 치킨을 시켜주거나 우리가 좋아하는 책이나 장난감을 사주는 선물이 함께 했다.
늘, 공부만 시킨 건 아니었다. “오늘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서점에 가볼까?” 하면서 광화문 교보문고에 데리고 가서 직접 읽을 책과 문제집을 고르게 하기도 하고, 아빠가 동네 대여점에서 빌려오는 비디오테이프 보면서 주말을 보냈다. 나름 작품성과 예술성을 갖춘 작품들을 선별해서 보여주었는데, 이를테면 벤허, 사운드오브뮤직 같은 명작들이었다. 어릴 때는 나름의 교훈을 주는 명작들을 보다가, 점점 크면서는 성룡이 나오는 액션 영화들도 보고, 007시리즈를 보면서 자라났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릴때부터 아빠의 취향이 참 많은 영향을 주었구나....) 이때 이후로 우리집은 함께 영화를 보는 게 주말의 낙이었다. 가끔씩은 집안에서 탁구대를 만들어서 둘씩 팀을 짜서 내기를 하기도 하고, 동네 맛집 탐방도 하면서 매주 주말 스케줄을 알차게 채웠다.
어릴 적에는 수업의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지 않은 ‘종호스쿨’을 꽤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못해도 혼나지 않고 잘한다고 칭찬만 받는 애정 가득한 학교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부모의 사랑과 시간을 온몸으로 누렸던 그 시절을 떠올리면 웃음이 나다가도 곧잘 뭉클하고 애틋해진다. 내가 만약 부모가 된다면, 이렇게 나의 온 에너지를 아이에게 바치면서 살 수 있을까? 내 시간에 대한 아쉬움 없이, 나의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즐겁게 청춘의 한 시절을 기꺼이 내어 줄 수 있을까? 아직은 자신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