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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진 Apr 02. 2021

효녀 코스프레

아빠 일기장을 몰래 읽었습니다

“차렷, 경례!” 

“저는 효녀입니다.”      


 갑자기 왠 효녀? 놀랍게도 이건 내가 학교를 다니면서 했던 인사다. 내가 다닌 중, 고등학교는 효를 강조한 나머지, “안녕하세요” 대신 “저는 효녀입니다”라는 인사를 시켰다. 처음에는 뜨악 했지만, 작은 것에도 꺄르르하며 웃던 시기라 우리는 이 인사조차 웃음으로 승화시켰다. 매일 매일 효녀로 살아가라고 인사까지 시켰건만...당시, 우리는 이 인사를 가지고 누가 누가 빨리 말하나 장난을 치고(고3때는 누구하나 제대로 하는 사람이 없었다.“전횸다”로 발음함), 거의 랩처럼 뱉으며 6년을 지냈다. 지켜보던 선생님들도 이럴 거면 이 인사가 의미가 없는 것 같다고 혀를 끌끌 찼으며, 너네가 진짜 효녀가 맞냐며! 매일 거짓말을 하고 사는 거라며 핀잔을 주곤 했다. (정말 효녀인지 한번쯤 생각해보라는 말을 하면서 훈계 했는데, 우리는 모두 그 말을 흘려들었다.) 항상 효에 대해 생각하라고 만든 인사였지만, 오히려 효에 대해 아무렇지 않아지는? 역효과만 불러일으킨 셈이다. 


 매일같이 나는 효녀다!를 외치던 그 시기, 나는 한 번도 효녀였던 적이 없다. 한참 승진을 앞두고 무리를 하던 아빠가 쓰러졌던 것이 중학교 2학년 때다. 아빠가 병원에 입원했던 긴 세월 동안 함께 한 시간은 정말 손에 꼽는다. 학교를 가지 않는 주말, 지하철을 1호선을 타고 두 시간을 가서 아빠를 만나고 왔던 기억, 그리고 병원에만 있기 답답해서 잠깐씩 퇴원해서 집에서 머물다가 다시 돌아갔던 기억이 드문드문 남아있다. 


 아빠가 퇴원해서 다시 집에 오게 된 건,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였다. 뇌경색 후유증으로 일을 할 수 없는 온종일 집에서 생활했는데, 그러다 보니 가족들과 부딪치는 일이 많았다. 사실 가족 중에서 아빠와 제일 다툼이 많고 갈등이 많았던 건 나였다. 아빠의 건강 회복을 위해 노력했던 엄마, 이제 막 대학생이 되어서 바쁜 일상을 보내던 오빠와 달리 나는 다시 아빠와 지내야 했던 일상이 버겁고 힘들었다. 물론 제일 힘든 사람은 아빠였다는 걸 안다. 환자의 편의에 모든 것이 맞춰져 있는 병원과는 다르게, 집안에는 아빠에게 불편한 점이 많았다. 이전까지 아무문제 없이 생활했던 공간이지만, 아빠는 모든 걸 다시 처음부터 익혀야 했다. 


 오른쪽 팔과 다리를 제대로 쓸 수 없어서 지팡이 없이 집안에서 걸어다니는 연습부터, 화장실을 쓸 때. 문을 열고 닫을 때 어느정도의 힘으로 당겨야 넘어지지 않는지, 의자에 앉을 때, 넘어지면 무엇을 짚고 일어나야 하는지를 아빠는 몇 번을 넘어지고, 물건을 떨어트리면서 익혀갔다. 그렇게 아빠가 자신의 불편해진 몸을 받아들이며 연습할 시기, 다치기 전보다 갑자기 가족들에게 화를 내거나 버럭하면서 욕을 하는 날도 많았다.

 

 지금이야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몸을 움직일 수 없어서 오는 분노, 짜증, 무기력감의 표현이라고 이해하지만, 그때는 어린 나이라 미처 이런 아빠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른 식구들의 마음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대로 표출하는 아빠의 모습에 당황했다. 그러다 아빠가 화를 낼 때면, 나도 참지 않고 화를 내거나 맞섰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그러지마, 아빠는 아픈 사람이잖아, 너가 이해해야지”라고 말했는데, 이 말도 나는 납득할 수 없었다. 아픈건 아픈거고, 아빠는 우리 가족의 아빠니까. 아프다고 해서 가족에게 하면 안되는 행동을 하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아빠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서, 속으로는 아빠가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주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TV에서 나온 다큐 프로그램을 보고 아빠에 대한 미움은 조금 가라앉았다. 당시 국가대표 태권도 선수의 가정사가 방송에 나왔는데, 그의 아버지 역시 뇌졸증으로 쓰러진 후에 다정하던 아버지가 식구들에게 짜증도 늘고 화를 많이 내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고. 그때 정말 많이 속상했다고 인터뷰 하는 걸 보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루륵 났다. 그때서야 이건 아빠의 문제가 아니었구나, 정말 어쩔 수 없는 거였구나 싶어서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아빠가 안쓰럽기도 하고, 그걸 이해해 주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과 함께. 그 뒤로 아빠도 자신의 감정을 조금씩 다잡아가기도 하고, 나도 조금씩 아빠를 돕고 이해하게 되면서 지금의 다소 안정적인 지금의 관계가 만들어졌다. 


 생각해보면, 아빠의 하루하루를 곁에서 지켜보면서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시기가 아빠와 내가 가장 사이가 좋은 시기인 것 같다. 한 집에 살면서도 그동안은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아빠의 일상을 조금씩 더 시선을 주면서 바라보고 있고, 아빠의 지난 과거를 일기를 통해 마주하며 조금씩 아빠를 알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한 가족으로 30년을 함께 했어도 여전히 나는 아빠에 대해 모르는 게 많다. 그래서 이전 같으면 듣고도 그냥 지나쳤을 아빠가 혼자 내뱉는 말들에 조금씩 귀를 기울여본다. 아빠가 “아유, 심심해”, “기분이 우울해”라고 말하면, 못들은 척 하지 않고 한마디를 걸어본다. “영화 다운 받아 줄까?”, “과자 사다 줄까?” 이런 사소한 말들 뿐이지만 작은 것으로 아빠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 줄 수 있으니까. 







<아빠 일기장을 몰래 읽었습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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