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교수님이 계시다. 선생님을 따로 뵌 건 대학 3학년, 교지 편집부 시절. 수차례 편집회의를 거쳐 결정한 주제를 들고 각 대학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기로 했다. 그 중에 선생님은 인자로운 표정으로 끝까지 들어주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분명 두서없이 얘기했을 텐데선생님은 우리 얘기를 가만히 들으시더니 기획안대로 하면 되겠다고 말씀해 주셨다. 연구실에 머문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선생님의 따뜻한 눈길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그 후로 선생님 소식을 들은 건 아마도 신문기사였을 것이다. 퇴임하시고 고향인 진해로 내려가 도서관 자원봉사를 하신다는. 그 기사를 접하고 참 선생님답다는 생각을 했다. 알고 보니, MBC에서 했던 <기적의 도서관>을 유치하기 위해 무척 애를 쓰셨다고 한다. 명성이 자자한 교수님이 ‘도서관 할머니’를 자처하시다니. 고 이효재 교수님은 그런 분이셨다.
아마도 감히 선생님을 닮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같다. 그때의 기억이 이어졌을까. 어느 날,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붙은 작은도서관 자원봉사자 모집 공고를 보는데 마음이 꿈틀댔다.
‘하자! 재밌을 것 같아! 젊은 엄마들은 바쁘잖아. 나 같은 사람이 도움이 되면 좋겠어.’
그런데 신청한 지 몇 달이 지났는데도 소식이 없다. 3월 어느 날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연락이 늦었습니다. 지금도 자원봉사가 가능하신지요. 신청해 주신 분이 두 분뿐이라 기다렸는데 아무래도 도서관 문을 열어야 할 것 같아서요.”
낭패다. 난 하루 반나절 정도만 시간을 낼 생각이었는데 둘이서 어떻게 한담.
일단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다른 자원봉사자는 나와 비슷한 연배의 Q. 오랫동안 자영업을 하다 접었더니 몸이 근질근질한 상태. 적극적이고 활달한 성격이라 몸을 사리지 않는다. 우린 아파트 건설사에서 선물한 책들과 기증도서를 정리하고, 작은도서관 운영규정을 만든 다음, 지금 형편에 맞게 하루 2시간씩 도서관 문을 열기로 했다.
도서관 분류법 따위 같은 건 알지도 못하고, 그럴 만큼 책도 많지 않아 어설프게 정리가 끝났다. 아직 수요자가 얼마나 될지 모르니 당장 컴퓨터 같은 장비를 사겠다고 예산을 청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당분간은 대출하지 않고 도서관에서만 읽는 것으로 정했다.
드디어 작은도서관 개관일. 아무도 축하해 주지 않을 것 같아 우리끼리 모이기로 했다. 나는 말만 꺼냈는데 Q가 김밥을 싸 오겠단다. 책 정리할 때 도움을 준 젊은 엄마들을 초대했다. 우린 개관 한 시간 전에 만나 응원의 기운을 듬뿍 받았다.
작은도서관 지킴이가 된 뒤 내가 달라졌다.
우리 아파트 성당 구역 모임에 가서 뜬금없이 도서관 홍보를 한다. 자원봉사 하게 됐다, 시간 되시는 분들 같이 하자. 마침 한 분이 레이더망에 걸렸다. 그렇지 않아도 딸이 엄마도 해보라고 권유했는데 놓쳤단다. 카톡 연락이 되니 다음에 개인적으로 연락해야겠다.
그저 인사만 나눴던 옆집 아이 엄마에게 도서관 지킴이를 하게 됐다고, 아이랑 놀러 오라고 고객 유치작전을 편다. 들어 보니, 가고 싶은데 아이들이 어린이집에서 돌아온 다음에 들르면 곧 문 닫을 시간이라 애매하단다. 아, 다음 회의 때 도서관 개방 시간을 조정하자고 얘기해야겠다.
가끔 작은도서관은 어떻게 운영되는지 인터넷 검색을 한다. 어떻게 하면 지속가능한 구조를 만들 수 있을까 주제넘게 고민한다. 언제 이사 갈지 모르는 세입자인지라 나 다음에 일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미리 걱정한다.
Q가 지킴이 하는 날엔 아이들이 많이 오는데 내가 있을 땐 왜 적게 오는지 은근히 신경 쓴다. 이래 봬도 내가 어떤 가게에 들어가면 손님이 줄줄이 들어오는 그런 존재감이라고 자부하지 않았나. 그런데 왜 아이들이 덜 올까. 지난주엔 날씨가 좋아서 놀이터에 노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주엔? 맞다, 학교에서 소풍 간다고 했지? 그래서 못 왔나 보다고 가슴을 쓸어내린다. 아무튼 쓸데없이 이유를 찾으려 한다.
생각만큼 이용자가 늘진 않지만, 그래도 제법 단골이 생겼다. 아이들은 편하게 책을 집어 들고 계단식 자리에 가서 누워서도 읽고 친구랑 머리를 맞대고 보기도 한다.
나도 틈틈이 어린이책을 읽기 시작했다. 도서관 지킴이 하면서 적어도 한 번 이상 웃게 되니, 자원봉사 하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며칠 전 일이다.
“오늘 여기까지 읽었는데 이렇게 접어도 돼요?”
도서관 문을 닫아야 할 시각. 한 친구가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묻는다. 대출은 안 되고, 자신이 읽은 데까지 표시해 두고 싶은데 그래도 되느냐는 질문이다.
“아, 친구들이랑 같이 보는 책이라 접는 건 안 될 것 같아. 그런데 내일 와서 펼쳐 보면 어디까지 읽었는지 분명히 기억날 거야. 걱정 마.”
살짝 실망한 아이 표정과 달리, 나는 이렇게 자잘한 질문을 하는 아이가 귀여워 살짝 웃는다. 그냥 마음 내키는 대로 접어버려도 모를 일인데, 착하다.
다음엔 이런 아이들을 위해서 책갈피라도 비치해 둬야겠다고 생각한다. 운영일지에 적어 둬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