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 친구 덕분이다
우리가 쓰는 초급반용 레인 중간쯤에 빨간색 깃발이 하나 걸려 있다. 특별한 게 아니라 그냥 ‘다이빙 금지’를 알리는 깃발일 뿐이다. 25미터 길이의 3분의 2 지점쯤이니까 처음 수영을 시작했을 땐 일단 거기까지 쉬지 않고 가는 게 목표였다. 선생님도 늘 그 쯤에 서서 자세를 교정해 준다. 가까워 보이는 데도 발차기를 해서 거기까지 가기가 쉽지 않다. 통통통통 열심히 발차기를 하지만 금세 힘이 빠진다. 오늘은 많이 갔겠거니 하고 멈춰 보면 꼭 깃발 앞이다. 심지어 호흡하면서 자유형으로 가는데도 이상하게 딱 그 지점에서 멈춘다.
처음 목표를 너무 낮게 설정한 때문일까. 마치 나의 한계인 것처럼 그 지점에 도달할 무렵부터 힘이 빠진다. ‘여기까지 왔잖아, 힘들어.’
어쩌면 레인 끝까지 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상하게 그 깃발이 보이면 숨이 차는 것 같다. 이걸 무슨 효과라고 해야 하나.
25미터를 완주하려면 그 고빗길, 마의 구간을 넘어야 한다. 어떻게 내 마음을 조련해야 할까. ‘이건 과거의 내가 안심했던 지점일 뿐이야. 넘어가자, 가뿐히!’
주 4일 수영. 내 체력으론 이 정도만 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같은 반 수강생들의 태반이 수업이 없는 토요일, 일요일에도 나와 연습하고 있었다. 잘하지 못하니 성실하기라도 해야겠다 싶어 폭우가 내렸던 하루만 빼곤 빠짐없이 출석했는데, 이게 다가 아니었다. 나야말로 복습이 필요한 사람인데 아차 싶었다. 그래서 요즘은 특별한 일정이 없는 한 주말에도 수영장을 찾는다.
자유수영 시간엔 시간 구애받지 않고 좀 더 느긋하게 연습할 수 있어 좋다. 같은 반 친구들이 자세를 교정해 주니 금상첨화다. 사이드 킥이 영 안될 때 주말에 연습하면서 감을 잡았고, 힘들기만 했던 자유형 호흡법도 복습을 거듭하면서 서서히 터득하게 됐다. 결론적으로 폐활량이 적은 나 같은 사람은 물속에서 숨을 길게 내뱉을 필요가 없는 거였다. 그 숨이 길면 내가 들이마셔야 할 숨도 길어질 수밖에 없다. 내 호흡에 맞게 짧게 해 보니 이게 훨씬 편하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드디어, 이 정도로 숨 쉬면 되겠다 싶은 감이 왔다. 이제 다음 과제, 빨간 깃발 ‘마의 구간’만 넘어가면 된다.
K는 수영 초급반에서 내가 제일 먼저 말을 건넨 친구였다. 걷기 전용 레인을 걷다가 잠시 쉬면서 젊은 나이에 수영하는 친구들 보면 부럽다고 했더니, 웬 노인네 같은 얘긴가 싶었나 보다. 내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 조심스레 묻는다. 알고 보니 나랑 띠동갑이었다.
“반가워, 같은 띠네!” 그렇게 K와 친구가 됐다.
K는 10년 전에 중급반 과정까지 마친 친구였다. 힘도 좋고 자세도 좋다. 자유수영을 하던 어느 주말, K에게 내 고민을 털어놓았다. 이상하게 깃발이 있는 곳에서 멈추게 된다고 얘기했더니 그럼 안된다고, 더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위로한다. 그러더니 당장 같이 한번 해보잔다. 자기가 뒤에서 몰고 갈 테니 나더러 먼저 출발하란다. 내가 먼저 하라고? 못 하는데…. 과연 될까.
통통통통, 음~파 음~파! 빨간 깃발이 보이자 여지없이 힘들어진다, 숨이 차다, 그런데 뒤에서 K가 쫓아온다고 했다, 더 나가야 한다, 힘을 내보자!
그렇게 멀리 있을 것 같은 25미터 벽이 손끝에 느껴진다. 해냈다! 드디어 징크스를 깼다. 나는 폐활량이 적고 체력이 약하다고, 못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내 한계를 깼다. 이 모든 건 K 덕분이다.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른다. 연습하러 나와서 실력이 조금씩 느는 걸 실감하니 수업 시간이 기다려진다.
결국 수영도 복습이 중요한 것이었다. 나처럼 진도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수강생에게는 더더욱. 꾸준히 연습하는 것 말고는 왕도는 없었다.
K가 30분 더 연습하고 같이 가자는데, 그러다간 진짜 방전될 것 같아 먼저 풀장을 나왔다.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란 게 이런 느낌일까. 그야말로 좋은 아침이다.